너의 창의성을 보여주렴!

너의 창의성을
보여주렴!

글. 최영훈(카피라이터) | 일러스트. 벼리 | 2021년 12호

2021. 12. 29 174

어떻게 아이의 창의력을 키워주고 측정하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내 안에 남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을 세상에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낼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표현할 줄 알기를,
나아가 모두가 감히 하지 못했던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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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수학과 국어는 달랐다

사회 시험이 대재앙을 불러왔다. 11월 중순에 있었던 사회 시험에서 80점 이하가 속출했다. 서재로 부모님 서명을 받으러 온 딸에게 이유를 돌려 물었다.
“은채야, ○○이는 왜 70점을 받은 거야?” “아~, ○○이는 서술형 답은 그냥 넘어가.”
“응? 그냥 넘어간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답을 쓰지 않고 넘어간다고. 그런 애들이 많아.”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80년대 산수책에는 단문으로 된 질문과 숫자와 기호뿐이었다. 중학교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한 과목에 특화된 애들도 평균 점수를 관리할 수 있었다. 국어를 못해도 수학에 큰 지장을 주지 않았고, 수학을 못하는 것이 국어에 별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요즘엔 그런 성적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이가 입학하고서야 절감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내 친구가 ‘요즘엔 국어를 못하면 다 못한다며 책 많이 읽히고 글을 많이 쓰게 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들었다. 허투루 넘겼는데 그 말이 백번 맞았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서술형 문제가 전 과목에 걸쳐 있었다. 그러니 3학년 사회는 오죽할까. 문제와 보기가 복잡한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답도 문장으로 써야 하는 문제가 많았다. 초등학교 3학년 사회는 구석기, 신석기 시대도 나오는, 문화와 역사 등을 포괄하는 과목이다. 그러니 내용이 단순할 리 없고 그걸 풀어 쓴 문장 또한 간단치 않다. 설령 어찌어찌 문제를 이해하더라도 글쓰기가 어려운 아이들한텐 그 답의 서술은 그림의 떡이다.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손을 놓고 마는 것이다.

저장된 건 꽤 많지 않을까?

도대체 왜 이럴까?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독서 교육에 열심인 터라 1학년부터 책을 많이 읽히고, 독서록과 일기도 꾸준히 쓰게 한다. 방학이 되면 수십 권의 권장 도서 목록도 준다. 아이와 아내에게 전해 들으니 아이의 반 친구들은 새로운 경험을 중시하는 부모와 함께 철마다 여행도 가고, 공공 도서관과 박물관, 미술관이 마련한 프로그램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논술은 필수요 미술, 음악은 옵션으로 학원을 다녀 내가 한가하게 맥주를 마시며 저녁 뉴스 볼 때쯤 집에 가는 친구도 흔하다고 한다.

표현을 해야 알지

색다른 경험과 길고 긴 학원 순례가 저 대재앙의 구조대는 아닌 듯하다. 그렇게 초중고 시절을 거쳐온 대학생들과의 경험을 돌이켜본 뒤 내린 나의 결론이다. 나는 십여 년 정도 여러 대학에서 카피라이팅 강의를 했었다. 기말 시험은 늘 20초 라디오 카피를 쓰게 했었는데, 학기 내내 카피 한 줄 안 쓰던 학생이 세 시간 만에 멋진 글줄을 내밀어서 황당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학생에게 왜 학기 중엔 조별 과제의 카피를 돕지 않았냐고 물으면, 대부분 선배들이 알아서 하기에 시키는 것만 했다고 답했다. 그래서 선배를 불러 왜 후배한테 카피 쓰는 걸 시키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 후배가 카피를 잘 쓰는지 몰랐다고 했다.

모를 수밖에! 사랑하는 마음도 표현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고, 멋진 이야기가 머릿속에 수백 개라도 소설로든 영화로든 표현해내지 않으면 무덤까지 가져갈 뿐이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이듯, 창의성도 표현해야 제값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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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을 꿸 줄 알았으면

이런 문제를 진즉에 경험했던 난, 딸을 머릿속에 있는 걸 밖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다섯 살쯤부터 재활용 박스나 골판지, 휴지심과 페트병 등으로 온갖 것을 만들려고 했다. 칼, 총, 공주가 사는 성, 마루 인형의 침대와 의자, 무대 세트 같은 창문이 열리는 집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가위와 색연필과 사인펜 등 각종 준비물을 잔뜩 늘어놓고 만들 준비를 마친 딸에게 먼저 디자인과 설계도를 그려보라고 했다. 뭘 만들 것이며, 어떻게 만들 것인지, 그러려면 무슨 재료가 필요한지도 써보라고도 했다. 아이는 머릿속에 있는 걸 나름 세세하게 그려나갔다. 디자인과 설계도는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시각화해서 자기뿐만 아니라 남도 이해시키는 도구다. 그걸 해내지 못하면 아이디어는 현실이 될 수 없다.

질문도 해본 사람이 한다

다음으로는, 질문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어떤 질문을 해도 답을 해준다. 며칠 전엔 함께 뉴스를 보다가 원내대표가 뭔지 물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대번에 “애들은 몰라도 돼”라거나, “그건 알아서 뭐하게”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내가 아는 거라면 답을 해준다. 특히 토요일 밤에 하는 ‘특파원 보고-세계는 지금’ 같은 프로그램을 볼 때는 질문이 쏟아진다. 저개발 국가가 뭔지, EU며 WHO는 뭔지, 세계 정치와 지리, 환경 문제에 대한 아이의 질문이 이어진다. 아무리 많아도 나는 질문마다 오래 생각한 뒤 신중하고 성실히 답해준다.

기본기를 묵묵히 갈고 닦으며

마지막으로는 시간을 들여 갈고 닦아야 능숙해지고, 그렇게 기본기가 쌓인 뒤에야 자기만의 고유한 기술을 창조해낼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건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배운 것이다. 목사인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플라잉 낚시를 가르친다. 매일 아버지와 강으로 나가 아버지의 폼을 흉내 내며 낚시를 배우던 둘째 아들은 어느 날 자신만의 낚시 리듬과 곡선을 만들어낸다.

난 농구를 통해 이것을 가르친다. 3학년이 되면 농구를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었고, 그렇게 올 1년 동안 농구를 가르쳐주면서 슈팅의 거리감을 익히고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선 연습할 때마다 수십, 수백 번의 슈팅이 필요하다는 걸 체득하게 했다. 연습 첫머리에는 지겨운 기초 드리블 동작과 기본 패스 동작을 반복시켰다. 스테판 커리처럼 슛도 잘하고 드리블과 패스도 잘하고 싶은 딸은 이 시간을 묵묵히 견디고 있다.

늦깎이 아빠의 바람

어떻게 창의력을 키워주고, 어떻게 창의성을 측정하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다만 내 안에 남과 다른 것이 있다면, 세상을 바꿀 만한 뭔가가 있다면 그것을 세상에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낼 뿐만 아니라 누구도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아무도 답을 찾지 못하는 답을 제시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모두가 감히 하지 못했던 질문을 하여 이 사회와 시대의 문제에 성큼 다가갈 줄 아는 사람도 되길 바란다. 이것이 카피라이터로 이십여 년 가까이 일해온 늦깎이 아빠의 바람이다.

최영훈는 부산에 사는 18년차 글쟁이이자 열 살짜리 딸을 둔 아빠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파주, 의정부, 평택, 대전 등을 오가며 사는 동안 여러 대학에서 광고, PR, 문화이론 등을 공부했다. 현재는 카피라이터와 칼럼니스트, 브런치 작가로 활동 중이다. 용띠 딸의 아빠이자 용띠 아내의 남편으로 살고 있으며, 최근엔 맥주를 마시면서 딸의 잔소리를 듣는 게 취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