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외출복, 멋스럽게 펀(fun)하게

한글의 외출복,
멋스럽게 펀(fun)하게손글씨 예술가 이산

글. 오인숙 | 사진. 남윤중(STUDIO 51) | 2021년 10호

2021. 10. 27 328

캘리그래피는 손으로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이다.
이 사전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이산 작가가 생각하는 좋은 글씨는 상업적으로는 쓰임새가 좋고,
감성적으로는 자기 감성이 잘 표현된 글씨다. 그런 만큼 각각의 쓰임새와 감정에 맞는 새로운 글씨체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늘 다르면서 새로운 글씨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발하는 자세, 그것이야말로 이산 작가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다.

전혀 다른 감성을 선물한 글씨 소매상

이산 작가는 그를 지칭하는 다양한 호칭 가운데 글씨 예술가를 선호한다. 한글 글씨를 주로 쓰니 캘리그래피라는 영어 표현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흔히 보이는 캘리그래피연구소나 캘리그래피학원 대신 이산글씨학교라는 이름을 내세웠다. 이런 대중적인 호칭 외에 스스로 명명한 타이틀은 ‘글씨 소매상’이다. 글씨로 밥벌이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예술적인 표현보다 실용적인 글씨를 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캘리그래피스트로서 이산 작가에게 대중적인 인기와 인지도를 안겨준 작품은 한 주류회사의 ‘참이슬’ 글씨다. 정작 술을 못 마시는 그는 처음 작업을 할 때 온갖 소주를 방안에 진열해놓고 일주일 동안 소주병만 쳐다봤다고 한다. 오랜 고민 끝에 서민의 술에 걸맞은 느낌을 강조하기로 했다. 글씨에서 무게감은 빼고 젊은 감각은 더했다. 이렇게 탄생한 새 글씨체는 삽시간에 이산이라는 이름을 알렸다. 이후 대한항공, 배스킨라빈스, KBS 등 수많은 기업, 기관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만큼 수많은 작업을 진행했다. ‘누구나 저마다의 여행이 있다’라는 항공사의 슬로건도 이산 글씨를 대표한다.

정규 배움이 없어 더 자유로운

그는 서예나 디자인을 공부한 적이 없다. 스스로 예술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글씨를 쓰기 전까지 70명이 넘는 직원을 둔 규모에 수출까지 활발한 전자제품 회사를 운영했다. 하지만 사업이 기울었고, 우연히 찾은 일이 공교롭게도 출판 일이었다. 타고난 미적 감각이 숨어 있었는지 기획을 하던 그가 북디자인에서 힘을 발휘했다. 최인호, 박완서, 용혜원 등 여러 작가의 책 제목을 손글씨로 써서 출판한 것이 캘리그래피의 시작이었다.
“글씨를 쓰면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많은 손글씨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죠. 글씨가 디자인의 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글씨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가 40대 중반, 처음에는 잘 써지지 않았고 이렇다 할 참고 서적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서예를 공부하자니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부담스러웠고요. 몇 년간 제 나름대로 글씨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이산 글씨가 정형화되지 않은 것은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예나 디자인을 공부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덕분에 같은 글씨를 반복하지 않고 매번 특성이 살아나는 글씨를 선보일 수 있었다. 서예를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한때 가졌던 콤플렉스가 그만의 장점으로 돋아났다.

도구의 차이가 차별화를 낳고

이산 글씨의 특별함은 도구의 차이에서도 비롯된다. 서예를 하는 경우 대부분 붓이라는 도구를 주로 사용하는데, 이산 작가는 최대한 다양한 도구를 활용한다. 붓의 종류도 다양하고 국내에서 잘 쓰지 않는, 언뜻 연장 같은 각종 도구를 구해 쓴다. 룰링펜, 페러렐펜, 스피드볼, 브라우스 등 영어권에서 만들어진 도구가 한글을 만나면 독특한 감성과 분위기를 낼 수 있다. 이런 도구를 잘 연구하고 활용하면 화려하고 장식적인 글씨, 전각 느낌이 나는 글씨, 귀여운 글씨 등 새로운 스타일을 개발할 수 있다. 물론 새 도구가 익숙하지 않아서 몇 번 써보다가 내던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다시 써보고는 어딘가에 어울리는 글씨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개발한 글씨체가 수십여 개에 이른다. 아마도 자신만큼 도구를 자유롭게 쓰는 이는 없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한다.

글씨 연구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도구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해례본의 활자를 보며 아이디어를 얻고 보자기의 격자 문양에서 또다른 글씨체를 개발한다. 최근에는 자연물이 들어간 글씨(화문도)와 한글 타투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산 글씨는 우산, 텀블러, 휴대폰 케이스, 가방 등에 널리 적용되어 실용적으로 쓰인다.

뻔하지 않은 펀(fun)한 글씨를

한국인은 손글씨를 좋아한다. 우리나라처럼 누구나 글씨를 배우고 쓰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예로부터 집집마다 가훈을 적어 걸었고, 요즘도 진지한 말을 쓸 때는 여전히 손글씨를 선호한다. “글씨 쓰는 행위를 멋스럽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글씨에 대한 감성”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글씨를 가르치는 학원이 늘어나고,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지는 건 반갑지만, “뻔하게 쓰는 글씨에서 머무르지 말고 어떻게 하면 더 멋지게 쓸까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산 작가는 아이들에게 처음 글씨를 가르칠 때는 “또박또박 쓰라”는 말을 버리라고 얘기하고 싶다. 아이들이 처음 글씨를 배울 때 대개는 네모 칸 안에서 쓰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 제한된 틀에서는 손놀림과 몸놀림이 자유롭지 못해 몸속의 리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니 먼저 흰 종이 위에 자유롭게 써볼 것을 권한다.
“작은 네모 틀에 글씨를 가두는 건 아이들의 손과 몸이 가지는 글씨에 대한 리듬을 죽이는 일입니다. 통제받지 않아야 사고와 생각이 자유롭고 표현력도 늘어나죠. 사랑이라는 글자를 쓸 때는 정말 사랑스럽게 써보라고 하면 좋겠어요. 글씨를 감정 표현의 도구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의력도 표현력도 결국 손끝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이산 작가는 캘리그래피를 ‘한글의 외출복’이라고 말한다. 내가 쓴 글씨를 보여주려면 외출복을 잘 입혀서 내보내는 것이 기본이다. 그는 오늘도 어떻게 하면 더 예쁘고 멋진 옷을 입혀서 한글을 내보낼까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