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오기 앞에 부끄러워서

아들의 오기
앞에 부끄러워서

글. 강신렬 | 일러스트. 벼리 | 2021년 10호

2021. 10. 27 57

계속 넘어지고 구르는 큰아이를 보고 있으려니 10여 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짠하면서도 걱정이 밀려왔다.
나처럼 쉽게 포기하면 안되는데…. 하지만 수없이 넘어지고 동생의 놀림도 참아가며 배워냈는데, 아빠는 쉽게 포기했다고
놀릴 것 아닌가. 놀림은 둘째치고 너무나도 쉽게 포기했던 내 모습이 아들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겨울이면 나만 왕따가 되겠구나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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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쓰는 일은 젬병인 나

어려서부터 몸 쓰는 일은 다 시원찮았다. 초등학교 운동회 100미터 달리기에선 꼴등을 다투었다. 요즘 전세계가 뜨거운 관심을 보이는 화제작 《오징어 게임》 속 마지막 게임인 오징어 게임을 어렸을 때 참 많이도 했는데, 몸이 빠르지도 힘이 세지도 않았고, 균형감각이 뛰어나지도 않았기에 편을 가를 때면 마지막까지 남는 깍두기 같은 존재가 바로 나였다. 그런데 두 살 위 형은 정반대다. 달리기에선 매번 1등으로 노트 10권을 타왔고, 축구, 수영, 오징어 게임,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등 몸 쓰는 일은 빠르게 익히고 다 잘했다. 세월이 무심히 흘러 중년의 나이인 지금도 크게 다를 것 없이 나는 운동을 그리 즐기지 않고, 형은 주말이면 집에 가만히 있질 못한다.

내가 20대에 갓 접어들었을 때 형이 꽂힌 운동은 스키였다. 틈만 나면 크리스마스든 명절이든 가족은 나 몰라라 스키장으로 향했다. 한번은 혼자 가기가 심심했는지, 스키를 가르쳐줄 테니 같이 가자 했다. 시큰둥한 내 반응에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까지 함께 가자며 비용도 형이 댄다고 꾀었다. 스키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설경 데이트 욕심에 나는 난생처음 스키에 도전했다.

‘다시는 타지 않을 거야’

형은 무릎 각도며 A자 발 모양, 무게 중심,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법 등을 짧게 몇 마디 설명하고는, 곧장 초보자 코스 리프트로 우리를 데려갔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도착점은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데 발을 움직이니 몸이 안 따랐다. 몸을 움직이려 하면 발이 안 따르거나 미끄러져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밑에 도착하니 한 시간이 넘게 흘렀고, 스키를 탔다기보다 넘어지고 굴렀으니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못 하겠다고 하니 형이 약 올리기 시작했다. “어린애들도 다 하는걸, 제수씨도 금방 배워서 안 넘어지고 부드럽게 잘 타네.” 뭐라고? 보니 평소 운동신경은 나와 별반 차이가 없고 특히 겨울을 끔찍이도 싫어하던 여자친구는 자세도 좋고 좌우로 턴도 부드럽게 하면서 내 곁을 스쳐가며 너무나 신나 했다. 그러더니 이내 중급자 코스로 간다고 약을 올린다. 살짝 자존심이 상한 나도 따라서 올라갔지만, 슬로프 아래를 내려다보니 금방 후회가 밀려왔다. 형은 쌩하니 내려가고 여자친구는 조심스럽지만 부드럽게 타기 시작했는데, 내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겁먹은 꼴을 조금이라도 덜 보여주려 한참을 서 있다가 무릎을 굽히고 발은 ‘A자, A자’를 속으로 100번을 되뇌며 정말 천천히 내려갔다. 하지만 곧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치달리다 가장자리 펜스에 부딪혀 넘어졌다. 창피는 둘째치고 벗겨진 스키는 저만치 위에 있고, 부츠는 펜스 틈새에 끼여 빠지질 않고···. 그래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는지 형이 재빨리 다가오더니 뿔뿔이 흩어진 폴대와 스키를 찾아오고, 부츠도 벗겨주며 낄낄거렸다. 부츠를 신고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며 ‘나의 스키는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다른 모든 운동이 그랬듯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아빠가 듣고 싶었던 말

10여 년이 흘러 여자친구는 내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큰애가 초등학교 1학년, 둘째가 유치원을 마치게 되는 겨울 어느 날, 당시 무주리조트 인근에서 근무하던 내게 갑자기 이용권이 생겨 무주리조트에서 2박 3일간 가족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눈 구경이나 눈썰매만 타던 아이들에게 엄마가 권했다. “너희도 스키를 배워 볼래?” 평소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큰애는 시큰둥했고 그나마 운동신경을 보이던 둘째는 환호했다. 갖은 감언이설로 큰애를 설득한 끝에 전문 강사에게 1일 스키 강습을 맡겨놓고 아래에서 어쩌나 지켜보았다. 둘째는 반나절 만에 강사의 가르침에 익숙해져 슬로프를 내려오는데, 큰애는 계속 넘어지고 구르고 있었다. 10여 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짠하면서도 걱정이 밀려왔다. 나처럼 쉽게 포기하면 안되는데···.

한겨울의 낮은 짧기도 하지! 해가 뉘엿 넘어갈 때 두 아들의 표정은 천양지차였다. 둘째는 너무너무 재미있고 신난다며 ‘내일은 혼자서 탈 거야’라고 큰소리쳤고, 큰애는 말없이 축 처져 있었다. 저녁 내내 아무리 격려를 해도 침울하기만 했다. “아빠는 너보다 더 많이 넘어졌어. 발목을 삐어서 지금도 안 타잖아. 우린 스키가 안 맞는 것 같으니, 너는 아빠랑 눈썰매나 타자.”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큰애가 이 말에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아빠, 내일 하루만 더 배우면 안될까?” 내심 아빠처럼 쉽게 포기하겠거니 했던 나는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될 때까지 배워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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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오기와 근성 앞에서

다음날 오후까지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던 큰애도 어느덧 폼이 잡혀갔다. 둘째와 리프트를 같이 타고 슬로프도 같이 내려오더니 마지막 날 오전에도 스키를 타겠다고 졸랐다. 이번에는 아빠만 빼고 엄마랑 같이 타겠단다. 다음 날 오전 셋의 모습을 지켜보자니, 문득 오래 전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포기해버렸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초등 1학년인 녀석도 넘어지며 동생의 놀림도 참아가며 배워냈는데, 아빠는 쉽게 포기했다고 놀릴 것 아닌가. 놀림은 다음이고 너무나도 쉽게 포기했던 내 모습이 아들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겨울이면 이렇게 나만 왕따가 되겠구나’ 싶은 걱정에 불현듯 선언을 해버렸다. “겨울이 가기 전에 아빠도 스키를 다시 배워내겠어.”

이후 스키를 취미로 둔 동료에게 부탁해서 업무가 끝나면 야간 타임에 스키를 배웠다. 운동신경이 둔한 내 몸은 여전했지만,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일어나는 큰아이를 떠올리며 이번에는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저녁마다 슬로프에서 넘어지기를 한 일주일 반복하니 어느덧 방향 전환도 되고 넘어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초보자 코스는 무난히 내려올 만큼 익숙해졌다. 자세는 좀 엉거주춤해도 그럭저럭 사람들 틈에서 부딪히지 않고 즐길 정도가 되었다. 일주일쯤 지나 겨울의 끝자락에 “아들들~, 우리 스키장 갈까?” 하고 당당히 권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좋다고 펄쩍펄쩍 뛴다.

자식을 가늠한다는 건

네 식구가 하하 호호 웃으며 스키를 즐기던 중 둘째가 “우리 중급자 코스에 올라가볼까? 여기는 좀 심심한데”라고 꼬드겼다. 망설이던 큰아이도 둘째가 계속 졸라대자 중급자 코스로 향했다. 나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너희들끼리 가~” 하고는 초보자 코스 아래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아이들이 되돌아왔다. “우리가 어려서 보호자가 있어야 된대. 아빠 엄마, 같이 가, 응! 같이 가!” 아내야 너끈히 탈 수 있지만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데···. “아빠는 아직 다리에 알도 안 풀렸고 많이 넘어져서 허리도 아픈데 중급자라니. 아빠를 죽일 셈이냐!” 입으로는 이렇게 말해도 어느새 넷이 나란히 리프트를 타고 있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저 코스도 내 발아래에 있겠지. 그 가파른 눈길도 아들들의 발아래 익숙해진 것처럼.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그런지, 주로 운동할 때 아이의 오기나 근성, 끈기를 가늠해보게 된다. 평소 눈앞에 맞닥뜨리지 않았을 땐 몰랐는데, 스키처럼 살면서 반드시 하지는 않아도 될 것에서도 아이가 쉽게 포기할까봐 나는 조마조마했었다. 하물며 삶의 방향을 결정지을 중요한 일일 경우라면 어떨까. 이번처럼 아들이 나를 정신이 번쩍 들게 할 일이 또 있어서는 곤란하겠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다. 부모라고 아이들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날 순 없겠지만, 아버지로서 부끄러운 일은 또 겪고 싶진 않다. 그래도 스키 같기만 해도 괜찮으련만.

강신렬은 토목공학을 전공한 후 건설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대한민국 주요 고속도로 건설에 이바지한 전문가로서 자부심이 크다. 초등학생인 두 아들과 어려서부터 국내 여행을 하면서 도로를 만들 때 쓰이는 공법, 에피소드, 아빠의 공적 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뿌듯하다. 가족과 함께 가능한 좋은 곳을 많이 찾아다니고, 특히 두 아들과 운동 및 레저를 함께하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