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서 솟는 즐거움이 더 강한

몸에서 솟는
즐거움이 더 강한

글. 홍수연 | 일러스트. 벼리 | 2021년 8호

2021. 08. 31 55

제때제때 집중해서 숙제하고 책을 읽는 아이는 대견하다.
그렇지만 아이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얌전한 모범생인 아들이 인터넷 게임이 아닌 다른 것들로 관심사를 넓히고, 그 안에 푹 빠지는 재미를 경험하게 하는 게 요즘 나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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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엄마, 나 심심해.”
“숙제는 다 했니?” “네.”
“피아노도?” “네.”
“그럼, 책 읽을래?” “그것도 다 읽었어요.”
“그러면 그냥 놀던지.” “뭐 하고 놀아?”
“할 게 없으면 내일 할 숙제를 미리 할래?” “싫어요.”
“그럼 아무거나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봐.” “아무것도 없어요.”
이러다가 밤이 되면 아이는 오늘은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며 불평하겠지.

우리집 둘째는 해야 할 과제를 따박따박 잘 수행한다. 피아노, 수학, 독서···, 할 일들에 집중해서 시간 맞춰 끝내고 게임 타임마저도 절제할 줄 알아서 내가 눈치를 못 챘는데, 그렇게 해서 생긴 여가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면 아이가 즐겨 하는 것이 게임밖에 없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집중력이 좋았다. 어린이집을 다닐 때도 누나보다 책을 오랫동안 읽었고 100까지 끈기 있게 숫자를 세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숙제를 빨리 끝냈고 책을 즐겨 읽었다. 그런데 커갈수록 심심해 한다. 열중하는 관심사가 없다. 인터넷 게임을 시작했기 때문일까? 공부도 잘하고 책도 잘 읽지만, 꼭 해야 하는 만큼만 얼른 마치고나서 더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할 게 없어 지루하다며 불평이다. 해야 할 일을 다 하고서도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

엄마가 초조해지는 이유

고민하던 중,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flow) 이론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몰입이란 어떤 활동에 깊이 열중해서 다른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상태, 그 느낌이 너무나 즐거워서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반복하고 싶은 경험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어떤 것에 깊이 빠져들어 시간의 흐름을 잊는 경험, 일상생활에서 이런 경험을 자주 하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몰입 이론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인간은 여가 시간보다 일을 할 때 더 몰입을 느끼기 쉽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몰입이 일어나는 상태와 관련이 있다. 몰입이 일어나려면 수행하는 과제의 난이도가 현재 본인의 능력치와 대등해야 한다. 과제가 너무 쉬우면 지루하다. 반대로 너무 어려우면 불안함에 빠져 곧 포기하기 쉽다. 대부분의 사람은 놀 때는 자기 능력의 한계만큼 스스로를 몰아붙이기 어렵다. 여가를 즐길 때 우리는 적당히 쉽고 안전한 수준에 머물게 마련이고, 그러면 곧 지루해진다. 자기 수준을 조금 웃돌 정도로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일이 주어졌을 때, 이걸 해내기 위해 본인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우리는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둘째가 몰입의 즐거움에 빠진 모습을 잘 보지 못했다. 혹시 아이가 게임을 할 때만 쉽고 확실한 몰입을 느끼고, 그 외의 활동에서는 그만한 즐거움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게 바로 게임중독? 아이의 열정이나 의욕이 제대로 펴지기도 전에 메말라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초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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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과 집중력은 다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큰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 아이는 집중력이 약하고 피아노, 독서, 수학 등 뭘 해도 엉덩이가 가볍다. 대신 관심사가 하도 많아서 스크린에 열중하지는 않는다. 비누도 만들고 쿠키도 굽고 햄스터도 돌보고, 더 할 일이 없으면 집안의 오래된 물건을 찾아서 다시 페인트칠을 하면서라도 책이나 문제집은 뒷전으로 미루는 아이다.

신기한 일이다. 집중력은 약해 보이는데 몰입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모습은 이쪽에서 더 많이 본다. 이 아이의 특기는 끊임없이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아서 진득이 공부를 할 틈이 없다. 그렇지만 이 아이에게는 지루한 순간도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고, 본인이 항상 신나 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 기분 좋은 느낌이 금세 전달된다.

서로 다른 두 아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집중력이 타고나거나 또는 계발되는 ‘능력’이라면, 몰입은 어떤 ‘마음의 상태’이다. 어른들이야 노는 것보다 일할 때 더 몰입을 경험하기 쉽다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어른들은 재미가 덜해도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고 확장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아직 의미를 통한 동기 부여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은 머리로 생각하는 온갖 의미보다도 몸속에서 솟아나는 즐거움이 더 강력한 나이다.

따져보니 ‘친구’와 ‘운동’이다

아이의 집중력을 유지하면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활동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게임만큼 즉각적으로 재미있고 확실한 성과가 보이지는 않더라도, 활동 자체만으로도 빠져들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일. 우리 아이를 관찰해보니 친구랑 놀 때가 가장 즐거운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남자 아이들은 친구랑 집 안에서 놀 때 전부 컴퓨터나 아이패드 앞에서 게임만 한다. 그렇다면 바깥에서 놀아야 한다. 친구들이랑 밖에서 노는 게 가장 좋겠지만, 아이들이 모두 바빠서 아무 때나 내가 원할 때 친구랑 야외에서 노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이다.
결국 내가 찾아낸 방법은 규칙적인 운동이다. 운동을 썩 좋아하는 활동적인 아이는 아니지만, 수많은 종목 중에는 분명히 아이에게 비교적 잘 맞는 운동이 있을 것이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운동을 찾기만 한다면, 그걸 통해 집중력 훈련하고 몰입의 즐거움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느낌을 오래 기억하기를

여태까지 축구, 야구, 농구, 수영, 스키, 테니스를 조금씩 시켜봤는데, 올해 3월에 시작한 주짓수가 아이에게 가장 잘 맞는 것 같다.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격투기는 자칫 잘못하면 남을 다치게 하거나 자신이 다칠 수도 있어서 항상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도 도장에 들어가 맨발로 매트를 밟으면 아이의 몸은 눈에 띄게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진다. 뛰어다니는 걸 싫어하는 얌전한 아이가 다른 친구와 몸을 부딪치며 강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 땀에 젖은 아이는 복숭아처럼 빨개진 얼굴로 싱긋 웃으며 엄마를 쳐다본다. 피곤한 날에도 도장에 가기 싫다 불평하지 않고, 운동을 끝낸 후에는 어느새 유쾌해져 있다. 집에 돌아와 깨끗이 샤워하고 저녁을 먹고나서는 더이상 심심해하지 않는 걸 보면, 아이에게는 오늘 하루가 만족스러웠나 보다.

코로나로 인한 방역정책 때문에 실내 스포츠를 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만, 아이가 이 운동을 재미있어 해서 매우 다행이다. 아이가 이 긍정적인 몰입의 느낌을 기억하고 언젠가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느낌을 구했으면 좋겠다. 조금 어렵더라도 자기 능력의 한계를 넓히는 경험, 그 과정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알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홍수연은 초등학교 6학년 딸과 3학년 아들을 키우고 있다. 3년 전에 직장을 그만둔 이후로 아이들과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이들에게 매몰되지 않는 삶의 균형을 찾으려 노력 중이다. 미국에서 십여 년 살다가 2년 전에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싱가포르에서 아이들 키우는 일상을 브런치에 '허니스푼'이라는 필명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