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춤추게 하는 순간

아이들을 춤추게 하는 순간

글. 장소형(방송작가) | 일러스트. 벼리 | 2021년 3호

2021. 03. 31 64

우리집은 한 달에 한 번은 파티를 한다. 케이크와 생일초가 빠지지 않는 소박한 차림에,
그날만큼은 자유롭게 손으로 김밥을 집어 먹기도 하고 곤충 피규어를 채집한다며 부산한 아이들을
지그시 바라보다 끝나기 십상이다. 준비하면서 엄마의 속이 타기도 하고 일손이 더 커지기도 하지만,
여백이 없이 연속되는 일상 속에서 잠시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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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에 환호하는 아이들

우리집은 한 달에 한 번 이상 홈파티를 연다.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케이크와 생일 초만 준비하면 되는 소박한 파티다. 우리집 파티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가족의 생일 파티와 크리스마스 파티, 어린이집 과자 파티 등으로 단련된 첫째 아이가 몇 년 전, 매달 한 번씩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었다. 우리 부부가 순순히 들어주면서 우리 가족만의 이벤트가 생겼다.

곧 누구의 생일이라는 말만 나와도 두 아이는 자동으로 ‘파티! 파티!’를 외친다.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파티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성립해야 한다. 첫째,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끄는 의식이다. 촛불만 보면 망둥이처럼 날뛰는 아이들을 피해 멀찌감치 떨어져 켠다. 하지만 식탁으로 케이크를 들고 오는 순간, 둘째의 입김 공격에 촛불은 절반 이상 꺼진다. 설상가상 첫째는 손을 뻗어 케이크 장식의 핵심인 초콜릿을 빼간다. 의식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촛불은 꺼져 있고 케이크는 뭉개져버린다. 다시 촛불을 켜고 겨우 의식을 치르면, 이번엔 ‘파티는 어두워야 제맛’이라며 첫째가 온 집안의 불을 끈다. 우리는 작은 휴대용 전등 아래 파티를 해야만 한다.

액자에 걸어두고 싶은 이 순간

“유럽의 중세 분위기를 재연한 동굴식당 같지 않아?”
내 말에 남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어둑어둑한 불빛에 의지한 저녁 식사이니 마냥 신 날 수만도 없다. 이내 과일과 김밥, 케이크를 폭풍 흡입한 첫째가 거실에서 곤충 채집을 하겠다며 포충망을 가져온다. 둘째도 포충망을 들고 곤충 피규어들을 숨기고 잡고를 반복한다. 두 아이가 노는 모습을 보며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여유롭게 식사를 한다. 평소에는 한 명씩 맡아 옆에 앉혀서 밥을 먹인다. 아이들의 요구에 따라 식사 도중 책도 읽어줘야 하니 정신없이 흘러간다. 그러니 여유로운 식사는 그나마 파티 때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이다.

여유가 생겼다고 대단한 대화가 오가는 건 아니다. 지그시 아이들을 바라보다 끝나는 파티이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아이들이 훌쩍 자라면, 이 순간은 어떤 추억으로 기억될까? 매번 파티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정물화처럼 남겨 액자에 걸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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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 그 속사정에 대하여

파티 성립의 둘째 조건은 함께 음식 만들기. 아이들과 함께 하는 요리는 생각보다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불을 사용할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최대한 아이들이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에는 뭐가 있을지 고민하는데, 보통은 과일이나 채소를 씻게 한다. 딸기의 경우, 세척부터 꼭지 따기까지 맡긴다. 각자 플라스틱 칼로 꼭지를 잘라내는데, 이때 딸기의 절반이 날아가버린다. 생선 머리를 잘라내듯 딸기 꼭지가 숭덩 떨어져나갈 때마다 나는 속으로 탄식한다. ‘에고고, 아까운 딸기를 어째···.’ 엄마의 속도 모르고 첫째는 한 마디 한다. “난 하얀 부분은 안 먹어. 익은 부분만 먹을 거야.” 지켜보던 둘째도 그대로 따라한다. 반 토막 난 딸기를 접시에 올리는 아이들. 과육의 절반이 사라진 딸기는 접시 위에서 빨간 얼굴을 내밀고 먹으라며 손짓한다. 하지만 나는 떨어져나간 딸기 꼭지에 손을 댄다.

그럼에도 마냥 웃을 수 있던

며칠 전 내 생일 파티, 남편은 출장 중이라 나와 아이들끼리 준비하게 됐다. 첫째는 자신에게도 요리 할당량을 달라고 요구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주먹밥을 부탁했다. 김가루를 밥에 섞어 꾹꾹 눌러 모양을 만들면 되니 쉽게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문제는 김가루였다. 첫째가 비닐장갑을 끼고 김가루를 집어서 밥에 투하했다. 이를 본 둘째가 옆에서 아우성을 쳐 비닐장갑을 껴주니 김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잠깐 한눈판 사이 김가루를 들이부었다. 식탁에는 검은 가루들이 흩날리고, 둘째는 코를 박고 혀로 핥고···.

‘주먹밥을 만드는 것도 이렇게 고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첫째가 칭얼댔다. 눈사람이 무너졌다고. 내가 꾹꾹 눌러 눈사람을 만들어줬다. 아이는 주먹만한 주먹밥을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초토화된 부엌을 얼른 정리했다. 그리고 우리만의 파티를 시작했다. 내 생일이라고 특별히 촛불을 끌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함께 촛불을 끄고, 초코 케이크를 잘라 먹은 후 내가 주먹밥을 먹으려 하니 첫째가 한 마디 했다. “엄마, 조금만 먹어. 내가 다 먹을 거야.” 엄마 생일이라며 같이 먹자고 만든 주먹밥이건만, 나는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먹는 것에서 엄마의 입장은 한결같다. ‘그래, 많이 먹고 쑥쑥 커라~.’

엄마의 피땀 어린 파티임을 아이들은 알까? 파티를 해도 가끔 허기진 이유를 알까? 그럼에도 함께할 수 있는 추억을 쌓았다는 것만으로 풍족해진다. 나에게 인생이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단련된 한 시절 같다. 파티는 그 한 시절을 장식하는 케이크 위 데코레이션 같다.

아이들이 열광하는 이유

보통 파티는 주말에 한다. 평일은 일정이 빠듯하게 채워져 있어 공백을 찾기 어렵다. 여백이 없는 일상은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학교와 어린이집이 끝나고 집에 오면 어느새 오후 대부분이 소진되고, 하늘엔 땅거미가 지려고 한다. 충분히 놀지 못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첫째는 매번 ‘오늘 밤 샐 거야’를 중얼거리다 잠이 든다. 요즘엔 둘째가 파티에 더 흥분한다. 늘 자신도 뭔가를 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다. 조리도구는 장난감이 된 지 오래, 틈만 나면 반죽기나 국자, 집게를 가지고 논다. 솔직히 이런 두 아이와 음식을 만든다는 건 엄마 입장에서 그다지 유쾌하진 않다. 식탁 위는 밀가루로 범벅이 되고, 개수대에는 때아닌 물난리가 난다.

아이들은 왜 파티를 좋아할까? 돌아다니면서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어도, 케이크를 더 많이 먹어도 잔소리하지 않기 때문일까. 이날만큼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평소 아이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다. 스트레스 사유에 대한 파악이 느리기 때문에 불편한 심기를 말보다는 울음이나 화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 같다. 가끔은 어른도, 아이도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 파티는 우리 가족의 정신적 여유를 되찾아주는 처방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는 재미, 별 거 있나

얼마 전 시에서 난 공고를 보고 텃밭 가꾸기를 신청했다. 처음엔 반대하던 첫째도 밭에서 곤충을 볼 수 있다는 말에 기뻐하며 재촉했다. 올 한 해 우리에게 또 하나의 재미가 생길 것 같다. 아이들은 커갈수록 다른 흥밋거리에 시선을 뺏길 것이다. 친구든 게임이든, 뭐든 간에 어떤 식으로든 부모와 점점 멀어질 것이다. 밀접 접촉자 관계가 유지되는, 지금 시기가 그래서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만의 소소한 재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아이들도 성장하고, 우리도 인생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이런 게 바로 사는 재미인가?

장소형은 20년차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곤충 덕후인 첫째와 첫째 덕후 둘째를 키우면서 일상을 포털 매거진 브런치에 기록한다. 90년대 인디밴드를 좋아하고, 브릿팝과 미국 작가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를 비롯한 여러 소설과 박준 시인의 시를 읽으며 가끔 감성을 충전한다. 아이와 함께 주로 책과 만화를 만들고, 나아가 동화도 쓰면서 다양한 세상 속 스토리를 만들어가려고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