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로드스쿨러로 가겠다

계속 로드스쿨러로 가겠다영화 감독, 작가 이길보라

글. 오인숙 | 사진. Ken Tanaka | 진행. 최지영 | 2020년 12호

2020. 12. 24 150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는 이길보라 감독은 로드스쿨러(road schooler)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동남아시아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밖에서 배움의 길을 찾았다.
스스로의 삶과 공부를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고 있다.
얼마 전 출간한 책 제목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처럼 그는 ‘경험’을 통해 가장 많은 것을, 값진 것을 배운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이길보라 감독이 살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더 큰 세상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 또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책을 쓴 것이다. 여행은 그가 예술가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창작하게 만든 첫 터닝포인트가 됐다. 그런 만큼 학교를 그만둔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기대했던 것보다 열 배, 백 배 더 많은 것을 길 위에서 배웠다고 털어놓는다.

어려서부터 논픽션 영역에 관심이 많아 다큐멘터리 영화를 즐겨 봤던 그는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 감독과 NGO 활동가에 대한 꿈을 키웠다. 좋은 감독이 되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하고,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알고 싶어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여행계획서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후원을 받을 만큼 당찬 학생이었다. 그렇게 마련한 여행 경비로 8개월 동안 인도, 네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8개 나라를 다녔다. 여행은 그에게 깊고 넓은 배움터이자 학교였다. 여행을 통해 실제로 NGO 활동가가 된다는 것, 그 지역의 이야기를 담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서브이미지

스스로 공부하고 교류하고 연대하고

다른 문화를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지구인으로서, 세계인으로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체험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시간이었다.
“땅이 넓고 교통편이 좋지 않은 동남아시아에서는 도시와 도시 간 이동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때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끝없이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아니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든가요. 내 걱정하다가 옆 사람 걱정하고, 다음 여행지 걱정하다가 한국에 있는 친구들 걱정하고, 그러다 한국 사회 걱정하고, 지구를 걱정하게 되죠. 그것이 제게는 감수성이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가 됐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며 ‘이렇게 계속 공부하면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열아홉 살에 하자센터, 또하나의문화, 공간민들레 등을 오가며 학교 밖에서 공동체 경험을 쌓았다. 그렇게 로드스쿨러가 됐다. 로드스쿨러는 학교를 벗어나 다양한 학습 공간을 넘나들며 스스로 공부하고 교류하고 연대하는 청소년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다. 학교에 다니고 다니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로드스쿨러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에게 명명할 수 있다.

“명명의 주체가 사회가 아닌 내가 되는 것, 스스로 배움의 학교를 만들고 삶을 자기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바로 로드스쿨러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했지만, 여전히 로드스쿨러예요. 지금도 제가 주도적으로 공부하고 교류하고 연대하고 있으니까요.”

“괜찮아, 경험”

이길보라 감독은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 즉 농인 부모 밑에서 자란 비장애인 자녀다. 하지만 부모와 겪은 불통의 경험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제한된 정보로 평생을 살아온 부모를 통해 배운 것들이 지금 그의 삶의 기반을 이룬 단단한 철학이 됐다.
“부모님이 삶을 이해하고 만나는 방법은 직접 해보고 가보고 먹어보고 만져보는 것이었어요. 그러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요. 제가 잠시 머뭇거릴 때마다 늘 말씀하셨어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괜찮아! 경험’이라고요.”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말 덕분이었을까. 네덜란드 유학 비용도 그렇게 마련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공부를 돈이 없어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했다. 배낭여행을 가기 위해 후원금을 모금했던 학창 시절의 경험이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줬다.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에 서류 심사를 통과한 후 면접을 보러 갈 때도 그랬다. 합격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암스테르담까지 면접을 보러 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그에게 엄마는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고, 아빠는 늘 그랬듯이 “괜찮아, 경험”이라며 용기를 북돋웠다. 덕분에 ‘붙어도 경험, 떨어져도 경험’이라는 생각으로 홀가분하게 면접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창의의 원천, 나와 주변을 깊이 들여다보기

예술가로서 여러 작업과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길보라 감독이 창의의 원천으로 꼽은 것은 ‘자신과 주변을 잘 들여다보는 것’이다. 아울러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을 때, 네덜란드에서 공부했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이 ‘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시간이 많으면 나와 주변에 대해 깊이 골몰하게 됩니다. 이것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연결되죠. 결국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 작업과 프로젝트는 대부분 저와 가족, 주변으로부터 시작됐는데, 저는 여기에 모든 세계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로드스쿨러’,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은 모두 사적인 경험에서 비롯됐다. 자신과 같은 탈학교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다뤘고, 청각장애인 부모와 자신의 가족사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또 베트남 참전용사였던 할아버지의 말에서 모티브를 얻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의 사적인 경험이 사회에 울림을 전한 것이다.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는 소통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한국 사회에 다양성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이길보라 감독. 그의 다음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