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야 꿈꿀 수 있는 세상에서

즐겨야 꿈꿀 수 있는 세상에서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글. 김문영 | 사진. 현진 (AZA STUDIO) | 2020년 11호

2020. 11. 27 225

영국 신사의 상징 같은 프록코트와 조끼 차림, 겉옷 주머니 밖으로는 회중시계의 줄을 멋스럽게 늘어뜨렸다.
고지도가 그려진 마법 가방과 해적의 망원경을 두 손에 들고 당장이라도 보물섬을 찾아 떠날 태세다.
경기도 파주에 SF&판타지도서관의 새 둥지를 튼 전홍식 관장은 많은 어른들이 오래전에 잊은 상상 속 보물찾기의 설렘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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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화 사회의 반가운 덕후

‘공부를 그렇게 하면 S대 가겠다.’ 아이가 공부 대신 다른 데 빠진 것을 한탄하는 어른들의 말이다. 이 말에는 아이가 열중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나 존중이 결여돼 있다. 때로는 아이 자신도 자조하듯 이 말을 사용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성적이라는 성취 기준이 인사고과 점수나 연봉으로 치환될 뿐. 오랫동안 학생 혹은 직장인의 성취와 거리가 먼 취미 활동을 시간 낭비, 돈 낭비로 치부하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제각각의 취향, 가치관, 살아가는 방식을 존중하는 다원화 사회를 향해 가고 있으니까.

재미있어서 열중한 일이 밥을 먹게 해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으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아카데미 작품상 등을 거머쥔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엘리트 교육과정을 거친 감독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괴물이 등장하는 호러와 판타지에 빠져 있었고 이 주제에 천착해 영화를 배우고 만든 ‘덕후’이다. 덕후란 어떤 대상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뜻한다. SF와 판타지에 빠져 3만 권에 육박하는 자료와 책을 수집한 전홍식 관장도 여기에 해당한다.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인재가 주목받는 시대에 전홍식 관장은 도서관을 설립하고 강연을 하고 글을 쓰며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왔다.

SF와 판타지가 그리는 세상

처음 도서관을 설립한 2009년쯤 학부모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아이가 판타지 소설에 빠져 학교를 안 가려 한다는 고민 상담이었다. 만나지도 않은 아이의 마음을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아이의 현실은 공부에 매여 있는 처지지만 판타지 속에서는 엄청난 능력으로 온갖 장애를 극복해 목표를 성취하는 영웅이 된다. 문제는 비슷한 소설들이 독자의 갈증을 더욱 심화시켜 끝없이 탐닉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전홍식 관장이 생각하는 해결 방법은 자극적인 재미만 추구하는 책이 아니라 이야기의 높은 밀도, 탄탄한 구성으로 독자에게 충족감을 주는 작품을 읽는 것이다.

전홍식 관장은 감동을 주는 작품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판타지, SF 세상의 뼈대를 만드는 세계관 강의를 한다. 이 강의를 통해 게임을 개발하는 회사나 웹소설을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판타지 세계의 구조와 요소를 나열하기보다 이야기의 핵심을 정립하는 게 올바른 스토리텔링의 첫걸음이라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이에요. 내가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벼운 질문에서 상상이 뻗어나가고 사랑받는 작품이 탄생한 경우가 많거든요. 좋은 SF와 판타지는 보는 사람이 함께 상상하게 하고 꿈을 갖게 하고 나아가 세계를 더 멋진 곳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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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아이와 함께 즐기자

좋은 SF라면 많은 사람이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동안 부모들도 자녀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자녀가 과학을 학습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긴 부모들도 많았다. 전홍식 관장은 부모의 이런 기대를 이해하면서도 부모가 아이와 함께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즐겨야 상상할 수 있고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SF 속의 과학기술들을 분석한 그의 책 《SF 유니버스를 여행하는 과학 이야기》에 담은 메시지도 같다. 잘 알려진 SF 속 과학기술은 대부분 그럴듯해 보이는 허구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F를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인공지능, 유전공학, 네트워크 같은 과학기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그 기술이 앞당길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육과정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어렵습니다. 수학, 화학, 지구과학, 물리학을 각각 분리해 배우는 데다 각 과목의 수준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도 벅차거든요. 물리와 지구과학을 연계해 생각해야 태양계의 구조를 제대로 알 수 있고 더 큰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까요?”

애정은 삶을 긍정하는 힘

전홍식 관장이 학교에서 경험한 것도 여러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이었다. 호기심을 갖게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방대한 지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의미는 있었다. 어려서부터 쌓아온 독서 습관 덕분인지 학습 내용에 대한 이해가 빨랐고 성적도 좋아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디지털 문화정책 연구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SF와 판타지를 즐기듯 디지털 기술과 문화의 흐름, 인간과 사회의 변화를 추적 중이다.

최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주제는 모바일 네트워크 게임과 SNS다. SNS는 알고리즘 시스템으로 사용자의 경험을 제한하고 모바일 네트워크 게임은 게이머가 적극적으로 플레이하지 않아도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둘 다 사용자를 수동적으로 변화시키며 중독성도 강하다. 전홍식 관장은 SNS와 스마트폰에 빠진 아이들에게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제안하고 싶다. 좋은 SF와 판타지도 열린 마인드와 적극적인 태도로 자기 삶을 바라보고 도전하게 하는 긍정적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일과 학업으로 바쁜 와중에 재미있는 읽을거리와 볼거리는 계속 등장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으로 그의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간다.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 조바심이 들 때도 있지만, 새로운 인테리어를 상상해보고 머지않아 이곳을 찾아올 사람들을 떠올리는 지금을 즐긴다. 전홍식 관장은 한없는 애정을 쏟을 무언가가 있고 그 열정으로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있어 스스로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