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떻게 변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변할 수 있어!

글. 이은화 (멀티아티스트) | 일러스트. 벼리 | 2020년 10호

2020. 10. 28 68

끈기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해낸다. 위인들 중에는 타고난 천재보다
끈기 있게 노력한 보통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이가 위인전을 읽고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예뻐 보인다. 책 속 주인공처럼 꿈꾸고 도전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 터다. 문제는 끈기 없는 부모가 아이에게만 끈기를 기대하고 강조할 때 일어난다.
그 단순한 진리를 최근 크게 깨닫고, 나 자신부터 끈기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내 딸은 성실의 아이콘

끈기의 사전적 의미는 ‘쉽게 단념하지 않고 끈질기게 견디어 나가는 기운’을 말한다. 이는 곧 성실성과 직결된다. 초등학교 5학년인 딸아이는 고맙게도 끈기가 없지는 않다. 솔직히 말해, 대놓고 자랑할 만큼 성실한 아이다. 발레, 수영, 피아노, 플루트, 영어 등 뭐든 하나를 배우기 시작하면 몇 년씩 꾸준히 했고,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성취도도 높지만 성실하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시간이 안 맞아 그만둔 경우는 있어도, 아이가 먼저 싫증 나 포기한 적은 없다. 자신이 하고 싶다는 것만 시켰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숙제를 단 한 번 미룬 적도 없었고, 0교시에 시작하는 리코더 동아리 활동에도 지각하거나 빠지는 법이 없었다. 한 시간이나 이른 등교가 힘들어 도중에 포기한 친구들이 많았는데도 말이다. 무엇보다 아이는 꾸준한 독서로 나를 감동시켰다.

“엄마, 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이는 안중근 위인전에서 읽은 말을 혀 짧은 소리로 해가며 매일 독서에 빠져 살았다. 무슨 책이든 손에 잡았다 하면 이름을 불러도 모를 만큼 몰입해 읽었다. 1학년 때부터 독서록도 꾸준히 쓰고, 일기도 매일 써 동네 엄마들 사이에 소문난 ‘성실의 아이콘’이었다. 학교 선생님들도 ‘알아서 잘하는 아이’, ‘의지와 집념이 강한 아이’라며 늘 칭찬해주셨다. 아이의 이런 성향은 어느 정도 타고난 거라 생각했고, 바쁜 엄마에게 신이 맞춤형 딸을 주신 것 같아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코로나19, 모든 걸 바꾸다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1학기 개학이 미뤄지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내 딸도 예외는 아니었다. 2월 중순부터 모든 학원을 그만두어야 했다.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한 영어 학원만 간신히 유지했다. 갑자기 아이도 나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동네 도서관까지 문을 닫으니 참 난감했다. 6월 중순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등교할 수 있었던 아이는 이 글을 쓰는 10월에도 일주일에 한 번 학교에 간다.

교사도 학생도 준비되지 않은 비대면 온라인 수업의 부작용은 예상보다 일찍 나타났다. 5~6교시까지 유튜브나 EBS에 있는 기존 콘텐츠를 이용한 일방적 영상 수업으로 채워지니, 아이는 금세 지겨워했다. 체육도 눈으로 하는데 어찌 재밌을 수 있을까.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아이는 자연스럽게 유튜브나 웹툰과 친구가 되었고 디지털 기기 조작의 도사가 되어갔다. 어느 날은 수업 영상을 2배속으로 돌려놓고(4배속일 수도 있다), 다른 창을 띄워 웹툰을 보다가 들켜 아빠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다 아는 내용인 데다 너무 재미없어서 그랬다고 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영상과 웹툰의 세계를 맛본 아이는 점점 책과 멀어졌다.

‘왜 책을 안 읽고, 쓸데없는 웹툰이나 보냐’라는 잔소리가 우리집에서도 일상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패드를 숨기고, 수업 시간 외엔 노트북 사용 금지령을 내리는 날이 많아졌다. 심지어 아이는 ‘집콕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다며, 산책도 거부할 정도로 무기력해졌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하고 싶은 것도 많던 아이는 더이상 없었다. 코로나 사태는 길어질 것 같고, 이러다 내 아이만 뒤처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육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라는 바로 그 엄마의 불안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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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알게 된 사실

도서관이 다시 문을 연 첫날, 개관 시간에 맞춰 아이와 함께 출동했다. 도서관 가는 건 여전히 좋아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동안 책을 멀리했던 아이가 어떤 책을 고를지 궁금했다. 원하는 책이 있다며 검색을 하던 아이는 10여 분 후 두꺼운 책 네 권을 골라왔다. 이국종 교수가 쓴 《골든아워》 1권, 2권과 인체해부학 전문서 그리고 심리학 책이었다.
“네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야지. 전부 어린이 책이 아니잖아.”
“나도 이제 어른 책 읽을 수 있다고. 《골든아워》는 내가 꼭 읽고 싶었던 책이란 말이야.”
“무슨 내용인 줄은 아니? 이국종 교수가 누군지는 알고?”
“알아!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외상외과 의사잖아. 엄마는 내가 젤 좋아하는 웹툰이 뭔지 알아? 바로 ‘중증외상센터 : 골든아워’라고. 내 꿈이 외상외과 의사잖아.”

찾아보니 그동안 아이가 빠져 있던 웹툰은 이국종 교수를 모델로 현직 의사가 쓴 웹소설이었다. 아, 그냥 허투루 시간을 보냈던 게 아니라 나름 꿈을 키우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웹툰에 대한 선입견이 강했던 나는 무조건 ‘안돼’라고 했으니. 아이는 400쪽이 넘는 1권을 이틀 만에 다 읽더니 2권도 정독하고는 내게 책 내용을 신나게 브리핑했다. 의학 전문 용어까지 써가면서. 인체해부학 책은 의사의 필독서라 골랐고, 심리학을 알아야 환자에게 잘 상담해줄 수 있다며 앞으로 심리학 공부도 계속할 거라고 했다. 허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아이의 꿈이 바뀌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봄까지만 해도 아이는 플루트 연주자가 되어 세계를 여행하며 살겠다고 했다. 연일 쏟아지는 코로나 확진자 관련 뉴스 때문인지 어느 날부터 꿈은 의사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이국종 교수처럼 힘들지만 꼭 필요한 외상외과 전문의가 되어 나중에는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일하고 싶다 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위해 살고 싶다고도 했다. 기특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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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없는 아이, 끈기 없는 어른

다시 독서 삼매경에 빠진 아이를 보면서 생각해봤다. “집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었어, 재미없는 책뿐이야.” 봄부터 아이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책장을 보니 저학년용 책들이 아직도 빼곡했다. 주니어용 책들도 대부분 사촌 오빠한테서 물려받은 것들이었다. 딸아이 취향에 안 맞는데도 살피지를 않았다. 읽을거리도 없고 학교 수업도 재미가 없으니 유튜브나 웹툰에 빠지는 건 너무 당연한데 아이만 탓했었다. 9월부터는 담임 선생님이 쌍방향 화상 프로그램으로 매일 출석 체크도 하고, 직접 녹음한 교재로 수업을 하니 훨씬 재밌어했다. 온라인이지만 친구들과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대화도 할 수 있어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일찌감치 온라인 라이브 수업으로 전환한 영어는 여전히 즐겁게 하고 있었다. 교육 콘텐츠와 방법이 문제였지 아이가 문제는 아니었던 거다.

코로나 상황에 따라 도서관이 자주 문을 닫게 되자 전자책을 볼 수 있는 사이트에 가입했다. 아이가 마음껏 골라서 보게 했다. 판타지 소설만 읽는 것 같아 신경이 좀 쓰였지만, 잔소리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이 우울할 때 판타지를 꿈꾸는 건 어른들도 마찬가지니까. 여전히 웹툰을 몰래 보는 것도 알지만 그냥 눈감아준다. 덕분에 아이의 웹툰 그리기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판타지 장편소설 쓰기에 돌입했다. 6학년 졸업할 때 완결 예정이란다. 읽거나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해보며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으니 응원하기로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아이 일기장을 다시 살펴봤다. 세상에! 서른다섯 권이나 된다. ‘하루라도 일기를 쓰지 않으면 찜찜하다’며 써온 게 벌써 5년째다. 아이는 80세 노인이 될 때까지 매일 일기를 써서 기네스북에 오르고 싶단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끈기 있고 성실한 사람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아이는 여전히 성실하고 멋지다. 나보다 훨씬 더. 결국 아이 마음을 헤아리지도, 진득이 기다려주지도 못한 내가 문제였다.

이은화는 미술작가, 평론가, 칼럼니스트, 대학 강사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는 멀티아티스트다. 바쁜 워킹맘이지만 아이가 속한 교육 제도나 환경에도 관심이 많아 학교운영위원으로 3년간 활동했다. 일과 놀이와 공부가 일치하는 삶을 지향하며 딸도 그렇게 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