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아서 더욱 눈부신,  있어서 그저 고마운

낡아서 더욱 눈부신,
있어서 그저 고마운 화가 이미경

글. 박미경 | 사진. 남윤중(AZA STUDIO) | 2020년 8호

2020. 08. 28 275

꼬질꼬질 때가 묻어도 반질반질 윤이 난다. 낡고 허름해도, 녹슬고 빛바래도, 풍경에 추억이 깃들면 그렇게 된다.
그는 무려 23년 간 이 땅의 구멍가게들을 화폭에 담아온 화가다. 한 가게씩 살뜰하게 맘을 나누고 한 터치씩
정교하게 색을 입힌다. 그 교감이, 그 작업이, 삶의 큰 위안이다. 오늘도 문 연 구멍가게들을 그리며 날마다 환하게 웃음 짓는다.

그림은 그리움의 다른 말

정겨움과 반가움 사이에 그리움이 있다. 마음속 등불이 돌연 환하게 켜지고, 까맣게 잊었던 것들이 문득 말갛게 떠오른다. 그가 그린 구멍가게엔 우리와 멀어져가는 것들이 가득하다. 빛바랜 지붕과 녹슨 간판, 때 묻은 문짝과 낡은 짐 자전거, 노란 평상과 빨간 우체통 같은 것들. 사람이 없는데도 사람이 느껴진다. 주름진 얼굴들의 따뜻한 미소가 금방이라도 눈앞에 보일 듯하다. 그림이 그리움의 다른 말이란 걸 그의 작품들이 단번에 일깨워준다.
“이미 문을 닫은 가게는 상상을 덧입혀 그리기도 해요. 주인 어르신의 이야기를 참조해 옛 모습으로 지붕을 복원하거나, 과거 있었음 직한 꽃나무를 가게 앞에 그려 넣는 식이에요. 그때가 그분들의 청춘이잖아요. 되도록 문을 연 가게들을 그리지만, 문 닫은 가게를 복원하는 과정도 나름 의미와 재미가 있어요.”

새 책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엔 2017년부터 최근까지 그린 구멍가게 그림을 실었다. 첫 작품집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후 3년 만이다. 그새 많은 곳이 문을 닫았지만, 여태 남은 곳이 있어 힘을 낼 수 있었다. 신간이 나오면 자신이 취재했던 구멍가게 주인들에게 갓 나온 책을 손편지와 함께 보낸다. 얼마 뒤 그의 집엔 그분들의 ‘마음’이 하나둘 배달돼 온다. 동네에서 손수 채취한 꿀이나 가게에서 제일 잘 나가는 두유, 꾹꾹 눌러 쓴 답장 같은 것들이다. ‘책 속에 내 삶이 다 들어 있다’는 한 아주머니의 편지엔 눈물이 났다. ‘그래, 이분들을 위해 그리는 거지.’ 사람이 준 보람이 가슴에 차올랐다.

이야기의 샘, 구멍가게

“구멍가게 덕에 아름다운 인연을 무수히 만났어요. 해남 우리슈퍼 아주머니가 특히 기억에 남아요. 젊은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딸이 저와 동갑이라며 눈물을 훔치시는 거예요. 한참 얘기를 나누고 가게를 나섰는데, 이미 50미터쯤 걸어간 저를 기어이 따라오시더니 캔 커피를 손에 쥐여주시더라고요. 제가 만난 건 단지 상점으로서 구멍가게가 아니라, 오랜 세월 가게를 지켜온 분들과 그 이웃이 빚어온 ‘이야기’예요. 그 따뜻한 이야기들이 사회생활 경험이 거의 없는 저에게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줬어요.”
그 여행을 통해 유년의 뜰로도 자주 놀러 갈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난곡, 거여, 노량진 등 여러 달동네로 이사를 다녔다. 가는 곳마다 선물처럼 구멍가게가 있었다. 양은 주전자에 아버지의 막걸리를 받아오던 상회도 있었고, ‘스뎅’ 국자에 달고나를 해 먹던 슈퍼도 있었다. 남아 있는 구멍가게들 덕에 그때 그곳들이 수시로 떠올랐다. 잊었던 행복이 우르르 쏟아졌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할 땐 포스트모던이나 신표현주의 같은 현대미술에 심취했어요. 그런 제가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게 저도 이따금 신기해요.”

펜화로 마음의 구멍을 메우다

결혼이 빨랐던 데다 두 아이를 잇달아 낳으면서, 그는 꽤 오랜 시간 작가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서울을 벗어나 광주 퇴촌으로 이사를 하면서다. 둘째를 가졌을 때 입덧이 심했던 그가 나쁜 공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찾아간 곳이었다.
이듬해 봄날이었다. 해질 무렵 두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는데, 늘 보던 구멍가게가 달라 보였다. ‘자신처럼’ 쓸모를 잃어간다고 생각했던 그 가게의 슬레이트 지붕 위로 연보랏빛 노을이 타오르고 있었다. 가게 유리창도 가게 앞 논도 온통 보랏빛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석양처럼 타올랐다.
“그 뒤부터 매일 세 시간씩 그 가게를 그렸어요. 완성하는 데 두 달쯤 걸렸는데, 우울감에 젖어있던 저를 그 시간이 살려줬어요. 세상과 단절되며 생긴 가슴의 구멍이 조금씩 메워지기 시작했죠.”

펜화를 택한 건 아기엄마로서의 제약 때문이었다. 유화물감 성분이 아이들에게 좋을 것 같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재료를 엎지르지 않아야 했다. 물감으로 하던 걸 펜으로 하려니 색감 표현이 제대로 될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기우였다. 단지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 표현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이내 알게 됐다. 단점은 시작한 지 23년이 됐는데도 작업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건 그대로 장점이기도 하다. 지금이 몇 시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선을 긋고 또 긋다 보면, 머릿속 고민이나 가슴속 걱정이 저만치 물러나곤 한다.
“이후 십 년 간 전시 한 번 안하고 그림만 그렸어요. 고작 열다섯 점에 불과했지만, 적금처럼 쌓아온 그것들이 삶의 큰 위안이 되더라고요. 남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혼자서 충분히 행복했지요.”

서브이미지

한 자리에 우뚝 선 나무처럼

그의 그림이 세상에 알려진 건 재미삼아 블로그에 올린 작품들을 보고 한 출판사 편집자가 전시회 추진에 앞장서면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말 그대로 봇물이 터졌다. 매일 12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리면서도 그저 신나고 즐거웠다. 완전한 몰입, 그 경험 때문이다. 지금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그는 말해주고 싶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매일 조금씩 해보라고. 그 시간이 눈처럼 쌓이면 훗날 꽃처럼 웃는 자신을 만나게 될 거라고.
“구멍가게가 주민들의 사랑방이었다면, 골목은 마을의 긴 복도이자 서로의 집 앞마당이었어요.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고요. 그 시절의 따뜻함을 요즘 아이들에게도 전해줬으면 좋겠어요. 새로 무얼 짓는 것보다, 구멍가게나 골목 같은 공간을 지키는 게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요.”

서울 아파트를 팔고 광주 퇴촌으로 이사했던 그를 지인들은 종종 어리석다며 놀린다. 경제 논리로 보자면 무엇보다 손해나는 선택이었으니. 하지만 그의 결론은 다르다. 자신을 구멍가게 그림으로 인도해준 곳이 바로 그 시골이었던 까닭이다. ‘전문가’라는 말을 좋아하는 그는 자신이 만난 가게 주인들이야말로 자기 분야의 전문가들이라 생각한다. 한 자리에 나무처럼 서서 한 가지 일을 오래도록 해나가는 사람들. 그분들의 우직함에 그도 자연스레 물들어간다. 함께 나눈 온기와 향기가 장밋빛 인생으로 그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