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거창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글. 이소연(전 방송인) | 일러스트. 김지영 | 2020년 7호

2020. 07. 29 119

아이들에게는 아이들 자체가 가진 힘이 있다. 하지만 부모로서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늘 걱정되고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럴 때는 작은 규칙을 정해 반복해보면 좋을 것 같다.
반복의 힘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관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설사 규칙이 깨진다 하더라도 다시 시도해보는
장기적인 관점과 실천에서 나온다. 조금은 느긋하게 아이가 가진 힘을 한번 믿어본다.

엄마의 자존감은 어디로

누구보다 엄마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과연 잘하고 있는지 늘 스스로 걱정하고 미안해하는 것 같다. 일과 양육을 다 해내면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고 있는 대한민국 워킹맘들은 정말 멀티 플레이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멀티 플레이어들이 죄책감을 갖는 게 안타까울 때가 많다. 아주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괜히 아이들에게 마음 고생 몸 고생 시키는 게 아닌지 늘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미안함과 안쓰러움, 고마움과 짠함. 역할도 멀티, 죄책감 종류도 멀티다. 아이들에게 논술과 스피치를 가르치면서 나도 ‘남의 아이는 열심히 가르치겠다고 일하면서 내 아이에게는 정작 소홀한 게 아닌가’ 싶어서 수업을 조금 줄여야 하는지 가끔 고민한다. 그러다가 또다시 생각을 고쳐먹고는 한다. 내 일을 가지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삶을 살아내고 있는데 왜 나는 죄스러운 감정을 가져야 하지? 억울한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가도 이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엄마가 정한 루틴, 내 발등을 찍기도

요즘 자신만의 작은 계획을 매일 일정하게 반복하면서 좋은 행동을 습관화하는 것, 즉 루틴을 가진 사람들의 얘기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일을 하면서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어렵다면 나도 반복적인 루틴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한 루틴은 딱 하나, 매일 책 읽기였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은 내가 한창 수업을 하는 시간이라 낮에는 책을 읽어주기 어렵다. 예전에는 아침에 아이가 눈을 뜨면 책 한 권을 바로 읽어줬는데, 실상 아침에는 시간 맞춰 유치원 갈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기 때문에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내가 책을 읽어주다 잠이 들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책을 더 읽어달라며 읽고 싶은 책을 여러 권 갖고 오는데 내가 잠에 취해 엉뚱하게 읽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죽하면 졸면서 읽고 있는 나를 보며 아이가 헛웃음을 터뜨렸을까.

결국 매일매일 책읽기를 반복하겠다는 유일한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책을 읽어주려고 침대에 눕는 순간 내 몸은 이미 잠에 취했고, 책을 읽느라 아이 취침 시간이 늦어지는 게 더 걱정돼서 일찍 책을 덮은 적도 여러 날이었다. 결국 하루 이틀 책을 읽지 못하는 날이 늘어나자 실패했다는 생각에 그냥 잠들기도 했다.

서브이미지

반복은 공백을 원칙으로 한다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면 가장 좋겠지만 중간중간 건너뛴다 하더라도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원래 실천은 작심삼일이 기본이다. 3일 잘하다가 3일 못하더라도 그 공백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냥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래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을 제안하는 이는 양육자이지만 반복을 습관화하는 주체는 결국 아이 자신이다. 돌아보니 띄엄띄엄 실천한 책 읽기도 아이에게는 경험이 되었다.

반복, 이미 잘하고 있다

사실 엄마가 매일매일 일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이미 반복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아이도 규칙적으로 유치원에, 학교에 가면서 매일 매일의 삶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기에 해야 할 일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다만, 아이에게 반복을 습관화하느라 애쓰기 전에 엄마 자신의 삶을 좀 더 좋은 습관과 반복으로 채우는 것에 더 집중하면 좋겠다.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땀나는 운동을 하고, 블로그에 짤막한 글을 쓰는 정도의 반복을 실천하고 있다.

서브이미지

끊어진 일상에서 깨닫는 힘

유치원이나 학교에 매일 가던 일상이 이제는 과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 가는 날과 가지 않는 날의 아이들 체력도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새삼 일상 속 반복의 힘을 깨닫는 요즘이다.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도 처음에는 등교하지 못하는 상황에 굉장히 속상해하고 답답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온라인 수업이 편하다는 말도 꽤 많이 한다. 또 온라인 수업으로 할 게 더 늘었다는 투정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외부 활동이 줄어들다 보니 살이 통통하게 오른 친구들도 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활동량이 현저히 줄었고 아이들은 더 심심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름의 반복적인 생활 리듬을 유지하는 아이들이 있다. 아침에 숙제를 다 해야 오후에 게임을 할 수 있다거나 늦어도 매일 밤 10시 전후에는 잠을 잔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다. 규칙적인 일상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반복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작은 반복이 습관이 될 때 아이들은 한 뼘 더 성장해 있을 것이다.

‘내 아이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좋은 습관을 만들어주기 위해 너무 많은 규칙을 정하면 엄마가 피곤해진다. 추가된 역할은 피로감만 불러온다. 그래서 꼭 지켜야 할 반복 사항은 한두 개면 족하다. 민준이를 기르면서 내가 속으로 항상 되풀이하는 말이 있다. ‘내 아이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가 가진 힘을 믿는다. 여러 가지 양육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지인에게도 이렇게 말한다. ‘네 아이는 잘 자라고 있어’라고. 누가 육아 철학을 묻는다면 딱히 철학이 없다는 게 철학일 수 있겠다.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면서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고 물으면 ‘그런 거창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나는 특정 교육 철학에 얽매이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그때 그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가르친다. 무엇보다도 그 철학이 엄마, 아빠 자신을 자책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 나도 그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자책은 하지 않길 바란다.

이소연은 ‘책, 말, 글은 함께 배워야 한다’는 모토로 경기도 파주에서 책말글을 가르치고 있다. 20대에는 방송인으로, 30대에는 이화여대에서 교육상담심리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일했다. 옆집 아이와의 비교를 가장 경계하며, 아이의 개별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래보다 조금 늦는 아이, 조금 다른 아이를 기르는 엄마에게 불안감 대신 ‘우리 아이는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강조한다.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워킹맘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