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의 샘에서 꿈을 긷다

재미의 샘에서 꿈을 긷다반려견 행동수정 전문가, 수의사 설채현

글. 박미경 | 사진. 현진 (AZA STUDIO) | 2020년 3호

2020. 03. 25 182

즐거움은 어려움을 덮어주고, 흥미로움은 수고로움을 가려준다.
생의 갈림길마다 ‘재미’를 선택해온 그가 경험으로 알아낸 삶의 지혜다. EBS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시작으로
세상에 얼굴을 알린 그는 시쳇말로 성공한 덕후다. 강한 흥미에서 진한 사랑으로, 그 사랑이 행복한 동행으로,
반려견이라는 존재를 통해 꿈을 키우고 길을 내왔다. 일과 놂과 앎이 하나다. 삶이 날마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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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뜰에서, 반려견과 사람이 함께 즐거운

뜰에 볕이 깊다. 어김없이 찾아온 새봄이 아낌없이 햇살을 흩뿌린다. 봄볕 가득한 마당에서 그가 몸과 마음을 잠시 쉬어간다. 반려견 세상이가 곁에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인다. 첫 만남에서 사람을 무서워했던 이 아이는 요즘 사람을 따라다니는 강아지가 되었다. 놀랍도록 행복하고 눈물겹게 감동적인 일들이 그의 삶 곳곳에서 그를 기다린다. 지난해 11월에 둥지를 틀었으니 여기서 맞는 첫봄이다. 이곳은 반려견과 사람이 같이 즐거운 공간을 표방하며 여럿이 함께 만든 ‘연희대공원’이다. 그가 이끄는 반려동물 행동진료센터가 이 안에 있다. 해를 품은 뜰 덕분에, 그도 세상이도 갈수록 빛이 난다.
“세상이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촬영 때 불법 번식장에서 구조한 강아지예요. 공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던 녀석이 이렇게 착한 강아지가 됐어요. 세상이가 스스로 해낸 거예요. 고맙고 대견해요.”
개가 ‘스스로’ 해냈다는 말이 귀에 박힌다. 그는 반려견의 문제 행동을 수정하는 데 필요한 것은 훈련이 아니라 교육이라고 믿는다. 훈련이 ‘시키는 대로’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면, 교육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반려견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갖고 기다리며 길을 안내하는 것. 그에게 보호자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그가 쓰는 표현들이다. 교정이 아니라 수정이고, 주인이 아니라 보호자다. 그가 선택한 섬세한 단어들이 오랜 사랑에서 비롯됐음을 짐작한다.

훈련 아닌 교육을, 체벌 아닌 칭찬을

“스스로 생각하는 힘은 체벌 중심의 훈련이 아닌, 칭찬 위주의 교육을 통해서만 발현돼요. 보호자들이 ‘안 돼’라는 말을 하도 많이 해서 개들이 ‘안 돼’가 자기 이름인 줄 안다는 우스개가 있어요. 보호자가 그 말을 자주 하는 건 양방향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제대로 소통하려면 개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꾸준히 관찰해야 해요. 한 달쯤 반려견의 몸짓언어를 유심히 지켜보고, 개가 무엇을 원하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지 파악해야죠. 연애도 그런 것 같아요. 아내와 오래 연애를 했는데, 처음엔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 다르게 이해했거든요. 지금은 ‘같은 사전’을 사용해요. 끈질긴 노력의 결과예요.”
지금 2세 계획을 갖고 있는 그는 자신의 아이도 그렇게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이의 언어로 쉼 없이 소통하면서, 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는 일. 그것이 좋은 부모의 역할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개는 개다.’ 그가 참 좋아하는 말이다. (사람이 아니니) 개 자체로 이해받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어를 ‘자녀’로 바꿔도 고스란히 말이 된다.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것. 사랑도 교육도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세상의 잣대보다는 사랑으로

“반려동물을 키울 때 부모의 역할이 중요해요. 자녀는 부모를 모방하거든요. 부모가 동물을 사랑하면 아이도 동물을 사랑하고, 부모가 동물을 학대하면 아이도 동물을 학대해요. 마찬가지로 부모가 공부를 즐기면 자녀도 공부를 좋아하게 돼 있어요. 유아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부모의 모범이 가장 좋은 교육인 것만은 확실해요.”
시작은 흥미였으나 이후에는 사랑이었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던 그는 자신의 집보다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가 첫 반려견을 집에 들인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슈나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키우면서, 절절함과 먹먹함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어떻게 만나는지 저절로 알게 됐다. 떠올리면 아직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슈나는 그에게 수의사의 꿈을 심어준 글자 그대로의 ‘반려’다. 수학과 과학이 가장 재미있던 그가 강아지라는 사랑을 만나 수의대를 선택했다. 카이스트에 동시 합격했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걸 해보려고 미련 없이 그곳을 포기했다.
슈나가 수의사의 꿈으로 그를 인도한 반려견이라면, 버블이는 동물행동 전문가의 길로 그를 안내한 반려견이다. 수의사가 된 뒤 강아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분리불안으로 몹시 힘들어하는 버블이를 보며 동물행동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미국에서 동물행동치료 과정을 연수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것만으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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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꿈이어선 안 되는 까닭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동물트레이너 양성 기관으로 유명한 KPA(Karen Pryor Academy)에서 트레이너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그는 동물의 병을 고치는 수의사이자 반려견의 행동을 수정하고 교육하는 트레이너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개가 문제 행동으로 버림받지 않고 사람과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 단지 개를 사랑했을 뿐인데, 그는 어느덧 꿈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직업 자체가 꿈이 돼선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친 적이 있어요. 만약 판사나 의사가 되고 싶다면 어떤 판사,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가 진짜 꿈이라고 생각해요. ‘어떤’이 빠지면 결국 돈을 쫓게 돼요. 그러면 재미를 잃게 되죠. 돌아보면 저는 언제나 재미가 선택의 기준이었어요. 주위에서 다들 카이스트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도 단호히 수의대로 갔고, 전망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모두들 반대하는데도 꿋꿋이 미국에서 동물행동학을 공부했어요. 그 선택에 아주 만족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생각해보는 것이, 꿈을 찾고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의 집무실엔 아이들이 손수 그려 선물한 강아지 그림이 여럿 있다. 작지만 큰 자부심이 그의 눈에 어린다. 그를 보며 꿈을 키울 아이들이, 그의 등을 별처럼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