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왕국에서 살아가는 생명력

겨울왕국에서 
살아가는 생명력생물학자 이유경

글. 김문영 | 사진. 현진 (AZA STUDIO) | 2019년 12호

2019. 12. 27 135

북극에 서식하는 3000여 종의 식물 중 2100여 종은 꽃을 피운다.
그 중 이유경 박사(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주범의귀. 빙하가 녹은 뒤의 척박한 땅에 가장 먼저 들어가 꽃을 피우는 개척자 식물이다.
과학자로서는 트렌드와 거리가 먼 영역에 몸담았고 여성이자 엄마로서도 내내 분투해온 이유경 박사의 삶이 바로 그 자주범의귀와 비슷하다.

북극 연구자에게 필요한 것

빙하로 뒤덮인 스발바르제도에는 우리나라 극지연구소에서 운영하는 다산과학기지가 진출해 있다. 북극의 대기와 해양, 빙하, 기후, 생물 등을 연구하는 곳이다. 이유경 박사는 지난 2003년 처음 북극을 방문한 이래 그곳의 식물과 미생물, 기후변화 등을 연구해왔다. 눈이 녹기 시작하는 6월부터 겨울이 시작되는 9월 사이에 주로 방문하는데 흙이나 바닷물에 사는 미생물 샘플만 채취해 연구소로 가져오느라 짧게 다녀올 때도 많다. 일 년에 여덟 번 이상 다녀온 적도 있어서 부산역보다 노르웨이 오슬로 공항이 익숙해진 느낌도 들곤 한다.
북극을 오간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북극곰을 궁금해 한다. 콜라를 좋아하고 펭귄 같은 동물과도 평화롭게 어울려 살아갈 것 같은 흰곰은 사실 무척 위험한 동물이다. 100미터를 10초에 주파하는 기민함으로 순식간에 적이나 사냥감을 덮친다. 그래서 북극 연구자들은 사격과 더불어 유사시 곰의 습격에 대응할 훈련을 받는다. 이유경 박사는 다행히 북극곰과 마주친 적은 없는데 다산과학기지의 동료들 사이에서는 곰의 습격을 받을 뻔했던 연구원들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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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과학자에게 더 추운 현실

북극에 대해서는 오해도 많고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많다. 북극에도 초원과 습지가 있고, 혹독한 추위에도 꽃을 피우는 식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렇다. 이유경 박사가 동료들과 함께 펴낸 《북극 툰드라에 피는 꽃》에는 강한 생명력을 갖고 살아가는 극지 식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최근 출간한 《엄마는 북극 출장 중》은 북극을 연구해온 과학자이면서 여성이자 엄마로 살아온 이유경 박사의 자전적 에세이다. 선생님의 권유로 우연히 들어간 중학교 과학반 시절, 과학 실험이 재미있고 퀴리부인이 멋있어 보여서 과학자를 꿈꾸기 시작한 소녀에게는 대학과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도 실험과 논문 외에 다른 것은 안중에 없었다. 그러다 결혼 후 첫 아이를 임신하면서 꿈을 포기해야 할 위기가 찾아왔다.
“경력 단절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성 과학자에게 주는 연구비를 받게 됐어요. 그 연구비로 한국해양연구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극지연구소가 신설되면서 이동했죠. 지금도 여성 연구원이 직업을 갖고 연구할 기회를 얻기는 정말 쉽지 않아요. 여성 과학인 선배들이 노력해서 기금을 만들고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노력한 덕분에 지금의 저도 있다고 생각해요.”

창의적으로 질문할 시간이 부족한 아이들

두 아이의 엄마이자 과학자로 산다는 것은 끝없는 투쟁의 과정이었다. 방과후돌봄교실이 다 해결해줄 수 없는 상황이 있고 그런 제도의 도움마저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두 아이와의 관계에서는 대화가 끊이지 않도록 하자는 원칙이 더욱 중요했다. 아이들의 수준에서 대화하기 위해 아이들을 판단하기보다는 관찰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관찰과 탐구를 반복하는 과학자라는 직업이 이럴 땐 도움이 된다.
이유경 박사는 어른의 과도한 의욕이 아이의 창의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큰아이가 푸는 수학 문제를 보고 놀란 적도 있다. 수학은 논리적 사고를 연습하는 학문인데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로 아이가 생각할 여지를 차단한다고 느꼈다. 극지연구소가 청소년에게 북극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 ‘21세기 다산주니어’에는 많은 과학 영재들도 신청하지만 제출한 자기소개서에서는 창의적인 발상을 찾아보기 힘들 때도 많다.
“과학자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보다는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질문하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 멍 때릴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현실에서는 아이들이 어려운 수학 문제와 씨름하느라 창의적으로 생각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지 않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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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줏빛 희생의 꽃이 좋은 이유

아이들을 조금만 다그치면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큰아이가 실용음악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는 걱정이 앞섰다. 둘째는 학원을 그만두면서 넉넉해진 시간에 주로 게임을 한다. 그래도 엄마의 욕심을 내려놓은 것은 두 아이 모두 좋아하는 일을 찾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도 비록 비주류이지만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을 찾아냈으니까.
돌이켜보면 홍조류의 성 분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출발부터 비주류였다. 극지연구소처럼 국가 예산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면 동토의 미생물이나 식물을 연구할 기회를 얻기 힘들다. 그마저도 단기 프로젝트에 연구비가 집중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연구해야 할 주제에는 접근하기가 더욱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경 박사는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더 큰 애정과 책임을 느낀다. 동토의 기후 변화가 우리나라가 위치한 지역의 기후에 미치는 영향, 미생물의 생태와 지구 온난화의 관계를 밝히는 일은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다.
과학 자체에서 얻는 즐거움도 크다. 빠른 반응과 성과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에서 이유경 박사는 인내하는 과학을 하고, 즐기는 사람이다. 오랜 관찰과 실험을 반복하며 서서히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낀다. 개척자 식물의 성취와도 비슷하다.

척박한 환경을 가장 먼저 찾아가는 식물은 자신을 희생해 다른 식물들이 살아갈 토양을 만든다. 강렬하고 화려하게 피우는 자줏빛 꽃잎을 보면 개척과 희생이 그 식물에게 최선의 삶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