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성숙에 이르는 길

인간의 성숙에 이르는 길법의학자 유성호

글. 김문영 | 사진. 남윤중(AZA STUDIO) | 2019년 10호

2019. 10. 24 101

20년 간 1500건이 넘는 부검을 실시했다. 누군가의 악의가 향한 죽음도 있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도 있다.
불의의 사고로 인한 죽음도, 가난했던 삶을 짐작하게 하는 죽음도 있다. 누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밝히려 기계적으로 시체를 마주하지만,
갈수록 죽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품게 된다. 법의학자는 두렵고 생경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민낯을 직시하고,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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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에 과학으로 답하는 일상

유성호 교수는 매주 월요일마다 서울대 의과대학으로 출근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의뢰하는 시신을 검사하기 위해서이다. 부검을 마치면 소견서를 작성하고 부검 내용과 관련해 법정 증언을 하기도 한다. 부검을 하지 않는 날에는 법원, 검찰, 경찰에서 보내온 자료를 검토하고 자문에 응한다. 보험 회사도 법의학자의 자문을 중시한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타살인지에 따라 보험금 지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자이자 교수로서 연구와 강의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전국 40개 의과대학 중 법의학자가 교수로 있는 곳은 10군데 정도. 법의학 교수가 없는 대학에서 가르칠 때도 있어서 강의 부담이 크다.
2013년 서울대에 ‘죽음의 과학적 이해’라는 교양 강의를 개설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사람은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더욱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반이었고, 20대 청년들이 과연 죽음에 관심을 가질지 의심이 반이었다. 다행히도 우려는 오래 가지 않았다. 개설하자마자 수강신청이 몰렸고 단기간에 정원 200명 이상의 대형 강의로 발전했다. 학생들이 강의를 듣는 이유는 다양하다.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거나 의문의 죽음이라고 불리는 사건들이 궁금해서 신청하는 학생들도 있다. 아마도 법의학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자극적인 이슈에 대한 호기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강단에 서는 입장에서 고무적인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 찾아온 학생들도 강의가 진행될수록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유성호 교수는 이 강의에서 죽음과 법의학의 지식들을 전달하는 동시에 죽음을 더 폭넓게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역사적 맥락과 사회 현상 속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짚어보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런 메시지는 올해 초 출간한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의 테마이기도 하다. 이 책은 대중이 읽기 쉽도록 쓴 법의학 소개서이자 수많은 죽음을 접하는 법의학자가 고민해온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법의학자가 마주하는 죽음은 대개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다. 처음 법의학을 공부하고 부검을 시작했을 때는 어느 날 갑자기 맞이할지도 모를 죽음에 두려움을 느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바뀌었다.
“병을 진단 받고 정신없이 치료에 매달리다 갑작스럽게 떠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연명의료는 옳고 그름을 논의하기도 조심스러운 문제이고요. 다만 생의 마지막 내러티브를 의사가 아닌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싶다면 죽음을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싶어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생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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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만 명 중 40명이 선택한 길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는 인생은 없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할지 끝없이 선택하는 것이 삶이고 각자 생각하는 삶의 의미에 따라 그 선택은 달라진다. 의대 본과를 마칠 무렵의 청년 유성호는 법의학에 매력을 느꼈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하겠다는 호기로운 마음도 있었다. 대신 보편적인 의사들처럼 경제적으로 더 윤택한 편한 삶은 기대할 수 없었다.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법의학자 수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12만 명이 넘는 의사 중 법의학자는 40여 명뿐. 우리나라에 법의학을 도입한 1세대, 혼란한 시국에 힘들게 법의학을 계승한 2세대를 거쳐 우리 법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3세대와 세계 수준임을 자부하는 4세대에 이르기까지도 지원자가 많지 않은 분야인 것은 변함없다.
“법의학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경제적 성취나 근무 여건도 비교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요. 부검의는 대부분 국과수 소속 5급으로 시작하는데 일반 5급보다 대우가 좋아요. 억울한 죽음을 밝혀 법과 인권을 수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한다는 보람이 크지요. 일을 하면서 인생을 생각하고 한 인간으로서 성숙하게 되는 경험도 소중합니다.”

더 노력하게 만드는 작은 동기

어쩌면 법대에 가려고 했던 중학 시절부터 법의학자가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법조인을 꿈꿨고 의대를 권유하는 부모님의 뜻을 따랐지만 결국 살고 싶었던 인생을 살고 있다. 유성호 교수는 문과 성향을 가진 이과생이 도전해볼 만한 진로 중 하나가 법의학이라고 설명했다. 끝없이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기에 공부를 좋아해야 한다. 평생 공부하는 삶이 지겨워 보일 수 있어도 그 속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행복한 법의학자가 될 수 있다.
“장남으로서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는데 사실 힘들잖아요. 항상 스스로 작은 동기를 만들었어요. 이 단원까지 공부를 끝내면 나에게 상을 주자, 맘 편히 쉬고 놀 수 있도록 보상하자는 식으로요.”
지금도 큰 것을 이루려면 작은 목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큰 목표가 있다면 직업에 충실하고 성품을 갈고 닦기 위한 작은 목표가 필요하다. 끊임없이 노력하기란 결코 쉽지 않아서 유성호 교수는 끝이 있는 작은 동기를 자주 만든다. 유성호 교수에게 죽음은 모든 일에 끝이 있다는 세상의 진리를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삶은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에 값지고 찬란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