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으면 가짜가 되니까

그렇지 않으면
가짜가 되니까작가 정유정

글. 최지영 | 사진. 남윤중(AZA STUDIO) | 2019년 9호

2019. 09. 26 1738

지난 5월, 3년 만에 《진이, 지니》를 선보였다.
전작 ‘악의 3부작’과 달리 뭉클하고도 한편으로 작가 자신의 넉살이다 싶은 웃음기 넘치는 입담이 반갑다.
평은 독자에게 맡기고, 작가는 부지런히 독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프로모션이 아닌 작가 자신의 휴식과 비움의 시간이다.
해외 20여 국에 판권이 정식 계약된 한국의 스릴러 작가, 지금껏 한국에서 그같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는 유일한,
언제나 가짜가 아닌 것을 이야기하려고 철저하게 공부하고 치밀하게 구성하는, 정유정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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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인물로 사는 시간

한 편의 소설을 쓴다는 것, 작가 정유정의 입을 통해 들으니 그건 ‘쓴다’라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었다. 작가는 ‘배우가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소감에 정유정은 수긍했다. 이전에 없던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뿐 아니라, 그 세계의 인물로 살아야 하는 긴 여정. 이번에는 보노보와 사육사 그리고 찌질한 남성 루저로, 《종의 기원》에서는 사이코패스로···, 작품마다 늘 그렇다고 했다.
3인칭 다중시점으로 여섯 명의 주인공이 얽힌 《28》은 끝날 때까지도 ‘내가 이걸 쓸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끝낸 작품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가짜가 되니까요. 일반인의 심리가 나오는 바람에 종의 기원은 세 번 정도 뒤집었어요. 지금까지 보통 사람으로 살아온 상식을 깨는 게 어려웠어요. 그러다 보면 남들이 보기엔 주인공이 아무리 짐승 같은 놈이라도 저한테는 가장 사랑스러운, 페르소나가 되는 거죠.”
그 페르소나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소설을 쓰고나면 번아웃을 감당해야 한다. 첫 스릴러인 《7년의 밤》부터 하나의 증상처럼,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고 머리를 비우는 일정 시간이 필요해졌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도 그런 이유로 종주했으며, 그것으로도 다 해소되지 않아 다시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지금은 독자들을 만나 ‘눈빛’ 스킨십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런 의미의 휴식이다. 다시 작품을 쓰러 들어가면 좌절할 때마다 꺼내 먹는 약이기도 하다.

공부를 ‘꽤’ 많이 하는 편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일명 악의 3부작이라 불리는 어느 것이든 첫 장에서 빠져든 독자라면 그 한 권으로 그치지 못할 것이다. 작가의 모든 작품세계를 열어보지 않고는. 스릴러의 본고장 영국의 독자들마저 놀랐다고 하는 그 긴박함과 밀도는 철저한 공부와 준비에서 얻는다. 이미 팬들에게는 고증 덕후로 유명한 작가. 평소의 야구광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고, 정신병원에 들어가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으며, 보노보의 눈빛을 제대로 느끼려 많은 전문가를 찾고 해외로 현장 조사까지 다녀왔다.
“작가가 글이 막히는 건 글 쓰는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라고 생각해요. 최소한 준전문가 수준은 돼야 그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겠다 생각해요. 그래서 공부를 꽤 많이 하는 편이에요.”
더하여 정유정이 안겨주는 몰입에는 이유가 더 있다. 흔히 인생을 뒤바꾸는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은 단 몇 일, 따라서 소설 속 시간은 대개 3박 4일 길어야 2주, 28일이다. 최소한만, 가장 작게 압축할 수 있는 시간을 잡으며 이야기는 부사와 형용사를 쓰지 않고 짧은 문장으로 풀어놓는다. 한편으로는, 그의 표현대로 모래알처럼 ‘서걱’거리기 쉬운 단문에 도치법을 쓴다든지 ‘은/는/이/가’ 조사를 활용해서 랩을 하듯 리듬을 준다. 그리고 감정은 직설로 표현하지 않고 다만 묘사할 뿐이다. 독자가 몸소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므로. 웬만해선 외래어를 쓰지 않는다는 방침도 글의 품위를 보장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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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우정, 생명의 의미 전하고 싶어

작가로서 정유정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자유의지’를 말하고 있다. 내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내 삶의 방향을 만들며 삶을 통제하는 힘, 이것이 그가 말하는 자유의지이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꿈꾸던 작가의 길이 아닌 엄마의 뜻대로 간호대에 진학했던 일, 어머니를 잃은 후 20대를 통째 가장으로서 세 동생을 보살펴야 했던 삶···, 한때 내 인생을 살지 못한 데 대한 성찰이라 여겨진다.
“나한테 주어진 운명을 버릴 수는 없어요. 도망을 가면 일평생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작가로서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강력하게 나를 붙들어맸던, 언젠가는 작가가 돼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그 의지가 컸던 만큼 삶에 무릎 꿇지 않고 헤쳐올 수 있었어요.”
결국 자신을 버티게 했던 그 욕망, 자기 삶에 대한 자유의지를 지금의 청년들에게도 권한다. 이 마음은 이미 《내 심장을 쏴라》에서 ‘분투하는 청춘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는 한 줄로 전한 바 있다. 친구들과 편하게 수다 떨며 커피 한잔 들지 못했던 자신의 20대 청춘에 대한 은유인 작품을 통해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고. 이후 지금까지도 위로와 사람 사이의 우정, 모든 생명의 의미와 평등에 대해 전하고 싶은 뜻은 변함이 없다고.

언제나 지난번보다 나아졌기를

정유정의 작품 가운데 두 편은 국내에서 영화로도 재해석되었으며, 영미권과 유럽 등 해외 20여 국에도 정식으로 판권 계약이 이루어졌다. 특히 독일에서 가장 반응이 크다는데, 《종의 기원》과 《7년의 밤》이 출간되었을 때는 독일 유력 언론에서 선정한 그해의 범죄 소설 10위권에, 아시아계 소설가로는 유일하게 올랐다고 한다. 영국의 한 대형 서점에서 가진 북 콘서트에서 그의 소설이 현장에서 매진된 일과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던 독자들이 다음을 약속했던 일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옥스퍼드대에서 가진 강연에서는 한국문학에 대한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의 뜨거운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릴러의 본 고장이라 할 독일, 영국에서의 호평은 남다른 자부심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이번 신작도 현재 전작들을 출간한 해외 출판사들에서 계약을 논의중이라고 한다. 해외 독자들에게 한국 정서를 고스란히 전하기란 늘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번 번역은 유독 더 만만치 않아 보인다.
결혼을 하면서 ‘내 집을 산 후부터는 소설을 쓰겠다’고 분명히 선언한 대로, 비록 수많은 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2007년 등단 이래 거의 2~3년을 주기로 6편의 장편소설과 2편의 에세이를 선보인 작가 정유정. 한편 엄마 정유정에 대해서는 다만 ‘쿨한’ 엄마로서 모든 과제를 아빠가 대신했다지만,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설 쓰는 뒷모습으로 전부 가르쳤음에 틀림없다.
곧 휴식을 끝내면 다시 딴 세상으로 기나긴 칩거에 들어갈 작가, 정유정은 언제나 어제의 나보다 솜씨가 좀 나아졌기를 바란다고 했다. 음, 지난번보다 발전했구나, 게으름 안 피웠구나, 이 소리를 듣는다면 그것으로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