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건 닮지 말지 그랬어’

‘이런 건 닮지 말지 그랬어’

글. 서현국(회사원) | 일러스트. 김지영 | 2019년 9호

2019. 09. 26 1280

내겐 아들 쌍둥이가 있다. 1분 늦게 태어난 둘째 아이는 나를 쏙 빼닮았다.
내가 일곱 살 때 삼형제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니
둘 다 사진 속 내가 둘째라고 짚을 만큼 생김새부터 하는 행동까지 나를 그대로 복제한 듯하다.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무언가 조립하기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몰두하고, 엎드려 잠자는 모습까지 어릴 적 나와 판박이라서 흐뭇했다.
그런데 평소 이런 좋은 습관들로 해서 샘솟던 뿌듯함이 한순간 싹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왜 항상 좋지 못한 것이 힘은 더 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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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쁜 것은 힘이 더 센가

아이들의 일곱 살 가을에 있었던 유치원 운동회. 평소 바쁜 회사생활로 아이들에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애들 엄마의 따가운 눈총에, 모처럼 휴가를 내 운동회에 함께하기로 했다. 더욱이 그날 행사의 취지가 ‘아빠와 함께 하는 운동회’라서 우리집은 쌍둥이를 위해 큰아빠까지 휴가를 내 참석했다. 큰아빠는 큰애와, 나는 작은애와 한 팀이 되어 각각 청팀과 홍팀으로 나뉘어 풍선 터뜨리기, 줄다리기 등등을 함께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초대한 큰아빠의 활약이 대단해서 청팀이 앞서가자 큰아이는 입이 함박만해지고, 반면 나 닮은 작은애는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역전의 기회가 남아 있었다. 이어달리기에는 큰 점수가 걸려 있어 여기서 이기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실내 체육관에서 하는 운동회라서 아빠들은 이쪽 편에서 아이들은 건너편에서 달려가 터치를 하고 아이가 결승점에 들어가는 경주였다. ‘이번에는 이겨야지’ 하고 출발선에 서서 아이를 바라보는데···.
건너편에서 잔뜩 굳은 표정으로 녀석이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결승이니 승리니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닮을 게 없어서 아빠의 가장 안 좋은 버릇을?’ 나는 멀리서 굳은 표정으로 아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내 표정을 보더니 아이는 더 긴장했는지 점점 심하게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이윽고 경주가 시작되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운동회의 함성은 사라졌다. 결국 마지막 경주에서도 진 둘째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고(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눈에 불빛을 내는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어 살살 달래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손을 보니 손톱을 다 물어뜯어 엉망이었다. 사실 나도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았지만 서럽게 우는 아이를 보니 뭐라 혼을 낼 수도 없었다. 다만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습관의 대물림 앞에서

아버지는 아들 삼형제를 키우면서 화를 내신 적이 거의 없다. 아니 평생을 누군가에게 화를 내신 경우를 헤아려도 열 손가락이 다 접히지 않을 정도로 항상 차분하고 너그러우셨다. 나 역시 자라면서 아버지께 혼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할 만큼 화를 내신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그건 내 나쁜 습관 때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초에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부모님과 동생은 시골에 남아 있고 형과 나 둘만 친척 집에 의지해 이른바 유학을 온 것이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낯선 서울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학교 운동회가 있었고, 마침 서울에 볼 일이 있었던 아버지가 운동회를 보러 오셨다. 아버지가 함께여서 초반부터 한껏 들떠 있던 나는 드디어 다가온 100미터 달리기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시골 학교 운동회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마다 꼴찌를 다투던 나였기에 아버지가 지켜보는 앞에서 또 꼴찌를 할까 걱정이 앞섰다. 내 순서가 다가올수록 더욱더 가슴이 떨렸고,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 무심코 나왔나 보다. 어쨌든 내 차례는 다가왔고 8명이 다투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꼴찌만 하지 말자’라고 맘먹었던 나는 이게 웬일, 2등을 한 것이다. 아, 서울 애들은 달리기를 잘 못하는구나. 게다가 2등 상품은 노트 한 권이었다. 이런 자랑스러울 데가! 시골에서든 서울에서든 운동회 달리기에서 항상 1등만 하던 형과 비교해서 달리기를 못한다고 생각했던 내게도 2등 상품이 생겼으니 지켜보시던 아버지에게 자랑하러 의기양양하게 뛰어갔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버럭 화를 내셨다. 달리기 경주 전에 내가 했던 나쁜 버릇 때문이다. 내 버릇은 긴장하면 손톱을 물어뜯는 것이었고, 잔뜩 긴장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계속 손톱을 깨물고 있었나 보다. 그 모습을 지켜보신 아버지는 4학년이나 되어서도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를 내셨다. 운동장 한켠에서 무슨 말을 하셨는지는 다 기억나진 않지만, 달리기에서 2등을 했다는 기쁨을 일순간 사라지게 만든, 태어나 처음 보는 아버지의 화난 얼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 아들 쌍둥이가 태어난 다음해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 시절 아버지들이 다 그랬듯이 다정다감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가부장적인 분은 아니라 가끔은 아들들과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셨다. 대학생이 되어 아버지와 대화하던 중 4학년 운동회 때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는지 여쭈었다. 아버지는 웃으시며 당신도 긴장하면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아들이 안 좋은 것을 물려받았다는 생각에 자신에게 화가 났었고, 시골로 돌아간 후 내게 미안해서 그 버릇을 깨끗이 고쳤다고 하셨다. 나도 그 사건 이후 그 버릇을 고치게 되었는데 이런 것도 대물림이라니! 나도 할아버지와 아빠에 이어 내 아이에까지 3대에 걸쳐 그 나쁜 버릇이 이어졌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헛웃음이 나고 신기하기도 했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이런 것까지 닮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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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이의 기분을 살폈더라면

지금 두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이다. 둘째의 손톱 깨무는 버릇은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 안 좋은 버릇이 평생 갈까 염려되어 애들 엄마도 나도 상기시키며 고치려 노력하지만, 화를 내거나 강압적인 말들은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로서 자신의 치부를 들키고 싶지 않은 심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싶다. 아울러 아버지도 나도 그 당시 아들의 기분을 먼저 봐주었더라면, 우선은 같이 기뻐하고 상한 기분을 먼저 달래줬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런 연후에도 먼저 아버지의 부끄러운 면을 쏙 빼닮은 점을 격하게 환영하고, 끝에 가서야 좋지 못한 습관이니 고치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더라면···.
실은 나 역시 아버지가 무섭게 화를 내신 이후에도 쉽게 그 버릇을 고치기는 어려웠고 스스로 고쳐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긴장을 하면 다시 이어지곤 했으니, 아이에게 무조건 고치라고 다그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조금 대범해질 수 있도록 아이들만 참여하는 캠프도 자주 보내고 긴장을 풀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찾도록 권유하고 있다. ‘무서우면 휘파람을 불어’, ‘긴장했을 때는 가벼운 스트레칭도 좋아’ 등등.
실은 좋다는 방법들을 아이 엄마가 이미 다 써보았다. 손톱을 예쁘게 꾸미면 고쳐질까 싶어 색색의 매니큐어를 발라주기도 하고, ‘엄마의 소원이 형처럼 손톱깎이로 손톱을 다듬어주는 것’이라며 그럴 수 있을 때까지 손톱이 자라도록 두면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내기도 걸어보고, 손이 놀지 않도록 레고며 건담이며 늘 뭔가를 조립할 수 있도록도 해보았다. 고민이 한창일 때 아이에게 쥐어준 요요며, 큐브며, 핑거 스핀 등 온갖 손 장난감들이 지금도 서랍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다행히 나이가 들면서 차츰 강도는 줄어드는 듯하고, 승부욕이 강한 만큼 학습이나 운동, 친구관계에서 두루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그 정도 버릇은 좀 덮어주는 면도 있지만, 엄마는 여전히 둘째 아이의 손톱을 형처럼 손톱깎이로 예쁘게 다듬어줄 날을 고대하고 있다. 사실 버릇을 확실히 고칠 수 있는 비법이라면 할아버지와 아빠의 그 경우밖에 없는가 싶기도 하다. 녀석이 자라서 본인을 쏙 닮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신의 나쁜 버릇을 물려받았음을 알게 되면 저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삭이면서 고치겠지. ‘이런 건 닮지 말지 그랬어’라며.

서현국은 건설회사에서 기획 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다소 늦게 맞은 아들 쌍둥이와 젊게 살고 있다. 두 아들이 보다 많이 체험하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중심을 잡으며 커가기를 바란다. 아들들이 드디어 삼국지를 읽기 시작했을 때가 가장 뿌듯했고, 역사 속 사건과 인물, 야사 등을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무릇 남아는 잡기에도 능해야 한다고 생각해 스키, 당구, 탁구 등 운동은 물론 요즘은 카드를 가르치며 함께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