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스토리를 건네고 싶습니다

거대한 스토리를
건네고 싶습니다EBS PD, 영화감독 한상호

글. 최지영 | 사진. 현진 (AZA STUDIO) | 2019년 8호

2019. 08. 28 2216

한반도 공룡의 일생을 담고 싶었던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타르보사우르스 ‘점박이’는 뜻밖의 영광과 운명을 안겨주었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한반도의 공룡’은 센세이셔널한 환호와 함께 4년 후 스크린용 애니메이션으로,
지난해에는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2 : 새로운 낙원’으로 재탄생했다.
사실적인 연기의 동물 애니메이션은 디즈니나 픽사에서도 시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새로운 영역이다.
경계를 넘어 거대함과 치밀함을 동시에 파고드는 감독이자 이야기꾼 한상호를 만났다.

‘점박이’와 함께한 10년

“그 세계에 다녀왔더니 10년이 흘렀어요.”
결국 국내 방송계는 물론 애니메이션 영화의 기술과 시선을 한 차원 끌어올렸지만, 냉정한 현실의 한계와 맞닥뜨린 도전과 극복 과정이었다. ‘점박이 2’ 제작에 들어선 6개월 동안 그는 단 하나의 OK 사인도 내줄 수가 없었다고.
관객의 시야에 흐르는 작품 속 1분 30초는 수많은 스태프들이 6개월을 꼬박 매달려야 탄생되는 세계. 총 90분을 위한 5년의 시간. 아이 공룡 막내와 파랑이의 눈동자 색상 톤과 밝기, 투명도까지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세심하게 신경썼다. 한정된 예산에서도 음악과 영상만큼은 양보하지 않는 터라 체코로 달려가 프라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녹음했고, 중국과 뉴질랜드에서 촬영했다. 점박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생각하면 얼마 전 회자되던 한 예능 PD에 맞먹는 인센티브쯤 짐작해보지만, 그는 ‘보람’이라는 무척 ‘다큐스런’ 한 마디로 정리했다. 초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그만큼 한국의 대표적인 콘텐츠가 됐잖아요. 그런 콘텐츠를 인생에 한 번 만들고 간다는 것이 누구든 쉬운 일이겠어요?”

서브이미지

시선은 이미 저 너머에, 깊이

점박이 이전부터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보자는 자신만의 선이 있었다. 일찍이 영국 BBC나 독일 ZDF에 맞춘 시선이었다.
인류 최초의 그림문자에서 알파벳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로드무비처럼 담아낸 ‘문자’는 인문교양 다큐멘터리의 효시로 칭송받는다. 정교한 완성도를 위해 사전에 짠 풀 스크립트 위에 중동의 문명 발생지와 영국 대영박물관까지 로케이션한 이 작품은 이전까지 없던 스타일로 삼성언론문화상을 수상했다. 그 뒤 ‘마이크로의 세계’는 하루 동안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역시 전에 볼 수 없던 미시 세계를 특수 장비들을 동원해 촬영했다. 이 작품에 처음 도입한 기법도 이후 타 방송이나 광고에서 흔히 쓰였다고.
스케일과 깊이 모두 파고드는 만큼 방전되기 쉬운 여정의 끝에서 2005년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재충전이 절실했다. ‘점박이’는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 탄생한 빅 콘텐츠인 셈.

정신적 새로움으로 치유하고 충전하는, 나는 그런 사람

한편, 점박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중에 소설 한 편을 썼다. 모험의 여정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해가는 소년이 주인공인 판타지 소설 《공룡 전사 빈 : 티아맛 대륙의 전설》. 영화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써내려간 스크립트였는데, 전작의 후속 차원으로 사람과 동물이 함께 어울리는 판타지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매일 새벽 출근하기 전에 세 시간씩 몰입한 일 년여 동안의 창작은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 충전 기회였다.
“쓰다 보니 너무 재밌어서 소설로 써내려갔어요. 영화 제작 과정은 무엇이든 제 맘대로 되는 게 없잖아요. 늘 타협하고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죠. 하지만 이건 순수하게 내 생각대로 할 수 있잖아요. 매일 소모되며 피폐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은 뭔가 정신적으로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죠.”
언젠가부터 어느 도시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여행도 휴식과 치유가 되었다.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좋은 카페를 찾아 커피도 마시며 웨이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해지는 풍경도 보면서 낭만을 쌓고는 했다. 런던 유학 때 윈저 부근의 동네에서 살았던 날들, 점박이 1편이 끝난 후 미국 퍼시픽하이웨이 가운데쯤에 있는 작은 항구 마을에서 펠리컨이 사냥하는 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보냈던 시간들.
어쩌면 점박이의 팬일 아이와 부모에게도 그는 이런 여행을 권한다. 캐리어에 그가 권하는 영국 작가 닐 게이먼의 그래픽노블들을 챙긴다면 더 폼 나겠다. 지금의 한상호를 만든 거의 모든 밑천이 독서라고 하니 참고해봄 직하다. 대개 엄마들이 아이가 만화책 잡는 걸 달가워하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권하는 수준 높은 작품이니.

어릴 적 상상하던 것이 지금의 키워드

작품이 끝날 때면 서 있지도 못할 만큼 몰입하고, 상실감에 복통이 동반되는 번뇌도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음을 모색하는 이. 지금 그는 한시만의 어감에 감탄하면서 중국어 배우는 재미에 빠져 있다. 어떤 분야든 경계 없이 늘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성장하는 데 마음을 둔다. 독서나 늘 뭔가 혼자 하는 게 편한 사람. 돌아보면 어릴 때 책에서 만났던 미이라, 만리장성, 피라미드 들이 지금 상상과 창의의 근원이다. 자신이 생긴 모양대로 살아올 수 있도록 허용해준 부모님의 방식을 생각하며, 지금 아이들도 그렇게 커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타고난 기질과 생긴 모습을 바로 보고 그 모양대로 살아가도 괜찮다는 거죠. 부모님도 아이를 다듬거나 맞추려 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본업에서는 또 하나의 다큐멘터리에 착수했다. 60~70년대부터 최근의 BTS까지 시대와 함께 울고 웃었던 우리나라 대표 가수들의 노래와 인생을, 본인 인터뷰를 바탕으로 조명할 계획이다. 기억해야 할 것이, 그는 EBS의 장기 프로젝트 기획자라는 사실. 최근에도 늘 인기 순위 10위권에 오르는 장수 프로그램 ‘명의’와 ‘극한직업’도 그의 기획작이다. 12월초에 선보일 새 작품은 또 어떻게 결이 다를지 궁금하다.
그가 몸담은 현실의 스케일 안에서 점박이가 만들어졌다면 공룡 전사 빈은 그 한계를 넘어 탄생했다. 앞으로 더 길게는 문명, 신화, 전쟁 등 거대한 스토리를 건네고 싶다. 오랫동안 꿈꿔온, 모든 생로병사가 담긴 대서사를 펼쳐보고 싶은 이야기꾼이자 크리에이터 한상호 감독이 어서 다시 큰 결심을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