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깨고 세상과 소통하기

틀을 깨고 세상과 소통하기한국화가 김현정

글. 김문영 | 사진. 남윤중(AZA STUDIO) | 2019년 6호

2019. 06. 26 232

사회의 통념이나 고정관념이란 대개 사회 구성원 다수의 경험이 축적되어 생기며 그렇기 때문에 견고하다.
한국화가 김현정은 견고한 통념에 균열을 내는 작업을 해왔다.
그 균열은 발칙하지만 새롭고 즐거우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화는 더 이상 고루하지 않고 화가는 외롭게 화실에 갇혀 배고픔을 견디는 존재가 아니다.

내숭을 벗고 세상을 보다

그림 속 여인은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양은냄비를 올려놓고 라면을 끓여 먹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명품 가방을 향해 있다. 고상한 한복 차림이지만 현실적인 삶과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여인은 김현정 작가가 선보이는 ‘내숭’ 시리즈의 일관된 테마이다. 작품 속 여인의 내숭은 한심하거나 밉기보다는 웃음을 자아낸다. 욕망은 사회 통념에 충실하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내숭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모습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공감대를 바탕으로 김현정 작가의 작업은 매번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2013년 첫 개인전에서는 이틀 만에 출품작 13점을 완판했고 2014년에는 가나아트센터 개관 이래 최대 관객을 동원한 개인전 ‘내숭 올림픽’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소재는 현대인의 일상이지만 표현 기법과 재료는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김현정 작가는 한국 전통의 수묵담채를 토대로 동시대인들이 편하게 향유할 수 있는 작업을 지향한다. 여인의 저고리나 치마폭을 장식하는 한지 콜라주가 대표적인 예이다. 동서양 미술 기법의 만남이라고도 할 이러한 시도는 세계에 한국화의 가치를 알리는 성과로 이어지기기도 했다. 김현정 작가는 2016년 뉴욕, 독일 등에서 개최한 개인전의 호평에 이어 2017년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의 30인’에 한국 미술인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대중이 사랑하는 한국화의 아이돌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김현정아트크리에이티브센터의 대표로서 해나가는 모든 활동은 한국화의 대중화라는 꿈과 연결된다. 김현정 작가는 ‘한국화의 아이돌’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대중과 소통하는 데 적극적이다. 십여 종류의 SNS를 동시에 운영하고 아트 상품을 만들며 기업과 콜라보레이션을 추진하는 모든 활동은 미술이 비즈니스로서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믿음을 바탕에 두고 있다.
진로를 고민하던 대학 시절에는 배고픈 화가로 살아간다는 데 두려움이 있었다. 선화예중, 선화예고, 서울대 동양화과까지 미술계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음에도 전업 화가로서의 성공 가능성은 불투명했으니까. 입시 과외를 하면서 만난 학생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에도 화가라는 진로에는 회의적이었다. 이 제자들에게 훌륭한 선배이자 스승이 되려면 내가 먼저 그 길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한국화가 김현정의 출발점이었다.
“그때부터 정말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렸어요. 보통 미대생이 일 년에 다섯 점을 그리거든요. 피카소가 평생 작업한 분량을 보면 이삼일에 한 점을 그렸다는 계산이 나와요. 화가로 살아가려면 긴장하고 그리자고 생각했어요. 저는 창의력도 노력으로 얻어진다고 생각해요.”

순간의 상상과 노력하는 창의력

김현정 작가에게 창의성이란 타고난 기질보다 노력의 산물에 가깝다. 화가라고 해서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는 없다. 일상의 모든 순간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다르게 보려는 노력이 순간의 상상력을 키우고, 순간의 상상력은 전문적인 학습과 거듭된 연구를 거쳐 창의력으로 발현된다.
일상의 모든 경험은 작품의 영감이 된다. ‘투혼’이라는 작품은 끼니를 거르며 작업하던 와중에 아이디어를 얻었다. 배고파 쓰러질 지경이 되어 전투적으로 햄버거를 먹던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손에 기름을 묻히지 않기 위해 빨대로 감자튀김을 집어먹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재미있다고 생각해 그림의 소재로 옮겼다.
기업이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창의력을 이야기할 때면 자신이 공부하고 적용하는 아이디어 발상 이론을 소개하기도 한다. 익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대체하는 방법 같은 것들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있을 법한 자리에 황소를 놓으면 시선이 환기된다. 이론보다 중요한 기본은 엉뚱한 생각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집중해서 발전시키는 태도이며 이런 태도는 어려서부터 길러질 수 있다.
“부모님은 제가 어떤 얘기를 하든 섣불리 평가하지 않으셨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도록 권하셨어요. 아이들은 배우는 모든 것을 미술로 흡수하고 표현하잖아요. 아이가 그림에 관심을 보이면 입시나 진로 같은 현실을 생각하는 부모님들이 많은데 미리 걱정하거나 차단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재능과 열정이 있다면 자기 길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저도 더 노력하려고요.”

삶의 고민을 나누는 소셜 드로잉

부모의 무한한 신뢰는 지금까지 겪은 위기의 순간마다 견디고 다시 일어나게 한 동력이었다. ‘항상 믿는다’는 말이 은근한 압박인 걸 알면서도 기분 좋은 부담감을 느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할 때, 세 번의 시험을 망치고서도 한 번 더 해보자고 마음먹을 수 있었던 힘이었다. 김현정 작가는 우리 삶이 위기를 맞고 극복하는 과정이며, 수많은 고민과 마주해 해답을 찾는 날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SNS에 게시물을 올리면 각자의 생각을 더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이야말로 복잡한 삶의 고민과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는 동지이다. 김현정 작가는 대중과 함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소셜 드로잉’이라고 부른다. 대중과의 소통은 어렸던 자신을 향한 부모의 신뢰만큼이나 지금의 자신을 지지하는 기반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20대에 혜성 같이 등장한 젊은 예술가는 어느덧 서른 문턱을 넘고 결혼과 육아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할 나이가 되었다. 올 추석 즈음 열릴 개인전에서는 이 주제를 포함해 이 시대의 여성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를 새로운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그림은 사각의 틀에 담겨도 그림 속 여성은 틀을 깨고 세상으로 나와 또다시 화제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