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야기하는 글자

세상을 이야기하는 글자타이포그래피 연구가 유지원

글. 김문영 | 사진. 현진 (AZA STUDIO) | 2019년 5호

2019. 05. 29 89

눈을 가늘게 뜨고 돋보기 안경 너머로 한참 들여다보아도 읽기 힘든 글자는 노인의 마음에 작은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가족과 사회라는 더 큰 영역에서 새로운 상호 작용으로 이어진다. 출판 디자이너, 서체 개발자를 거쳐 연구 프로젝트와 가르치는 일까지 영역을 확장한 타이포그래피
연구가 유지원은 표현 기능을 뛰어넘는 글자의 사회성에 주목한다.

글자로 읽는 세상 이야기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워드 프로세서를 실행한다.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키보드를 누르면 프로그램에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는 서체에 따라 글자들이 모양을 드러낸다. 글자 위로 구역을 지정하고 서체 설정을 바꾸면 똑같은 흰 여백 위의 검정 글자였던 문서의 인상이 달라진다. 획의 두께와 길이,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고 배열하는 위치까지 섬세하게 조정된 글꼴은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시각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요소이다.
넓은 의미에서 타이포그래피는 폰트 개발부터 폰트를 사용하는 그래픽 디자인까지 망라한다. 홍익대학교 디자인학부에서 겸임교수로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치기도 한 유지원 작가는 글자를 둘러싼 모든 활동을 타이포그래피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은 저서 《글자 풍경》에서 다양한 사례와 함께 소개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저자는 글자를 중심에 두고 세계 각국의 도시 풍경을 새롭게 해석한다. 이탈리아에서는 글자의 둥글고 밝고 비례가 우아한 특징을 통해 글자들이 따뜻한 햇살 아래 나른하게 몸을 늘이고 있는 풍경을 떠올린다. 책의 또 다른 부분에서는 도로 표지판에 쓰이는 글자와 과학, 기술의 연관성을 이야기한다. 철학, 과학, 음악, 미술 등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자 이야기는 유니크하고 흥미롭다. 저자는 타이포그래피가 전공자만이 아니라 글자를 사용하는 사람 모두에게 의미 있는 삶의 영역이라고 이야기한다.

서브이미지

타이포그래피와 요리를 생각하며

책을 내고 강연을 다니면서 유지원은 ‘어떤 폰트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고는 한다. 보편적으로 무난하게 쓰이는 서체는 있지만 ‘중립적’이라는 말이 항상 정답일 수는 없다. 유지원이 펼쳐 보이는 글자들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지역과 시대,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빛나는 글자들을 만나게 된다. 중립적이고 기능적이고 표준에 가까운 글자가 아니라 다양한 서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폰트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텍스트의 맥락에 따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독자의 신체 조건이나 글을 읽는 환경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것이 타이포그래피예요. 그래서 타이포그래피는 좋은 요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타이포그래피는 어떤 재료를 싫어하는 사람도 그 재료로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조리하는 과정이다. 맛없는 음식이라도 건강을 생각해서 먹기 싫은 것을 참고 먹는 학생은 모범생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아이가 모범생일 수 없다면 좋아하지 않는 재료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요리법이 필요하다. 수학을 싫어하는 아이라도 수식의 아름다움을 알고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타이포그래피의 역할이다.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시각 커뮤니케이션

타이포그래피 연구도 글자를 사용하는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최근 유지원이 집중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교과서 서체 개발 작업이다. 초등학교 교실을 방문해 아이들의 생활상, 수업 풍경을 관찰하던 그는 1학년 아이들의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무거운 책가방 때문에 어깨가 굽은 것이 아니라, 글씨를 쓰는 손의 방향으로 어깨가 내려간 모습이 눈에 띄었다.
“교과서 용지의 재질이 원인일 수 있어요. 인쇄할 때 색이 잘 나오도록 광택 있는 종이를 사용하거든요. 광택지에 연필로 글을 쓰려면 지나치게 많은 힘을 줘야 해요. 힘을 덜 주고 적당히 쓰면 글씨에 성의가 없어 보이고 보는 사람에게 불성실한 아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죠. 외부로부터 불성실하다는 피드백을 받은 아이는 모멸감을 느끼고 이것이 쌓이면 자존감이 낮아져요.”
깨알같이 작은 글자로 된 의약품 설명서를 봐야 하는 노인의 시점으로 돌아가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자녀에게 대신 읽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겠지만 가족이라 해도 신체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다. 시험 공부를 하느라 바쁜 손주가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는 순간 노년과 젊은 세대의 갈등은 좀 더 깊어질 것이다.

이질적인 것들의 소통을 위해

유지원에게 타이포그래피 연구는 사회 갈등을 극복하고 조화롭게 살아갈 방법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학문들이 경계를 넘어 소통하도록 돕는 것은 타이포그래피 연구가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여러 분야의 전문가, 직장인들을 만나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ESC는 사회 문제의 합리적 해결에 관심이 있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로서 비전공자도 함께한다. 직장인들이 다수 참여하는 독서 모임은 책으로 배우고 익힌 내용을 토대로 그림, 조형 같은 창작 활동까지 연계하는 것이 특징이다.
“창의성은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성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를 즐기는 성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길러진다고도 생각해요. 저도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빛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과학자의 접근 방식은 타이포그래피 연구가에게 색다른 영감을 불어넣는다. 마찬가지로 유지원은 다양한 학문이 세상과 더 활발히 소통하는 길을 열고 싶다. 우리 사회가 창의성과 문제해결력을 키우는 데 타이포그래피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혼자만의 상상에 갇히지 않는 창의 활동을 계속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