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궁금한 마법의 성

아직도 궁금한 마법의 성

글. 이기원 | 사진 제공. 캐슬뮤직 | 사진. 장풍 | 2016년 2호

2016. 02. 26 310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기억하는가? 바로 그 1994년이었다.
김광진과 박용준으로 구성된 듀오, ‘더 클래식’의 첫 음반이 나온 때가.
서태지와 듀스가 음반 차트를 장악하고 있던 그때, 김광진은 산사에서 막 뛰쳐나온 것 같은 청명한 목소리로 ‘마법의 성’을 불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히트였고, 착한 노랫말과 고급스러운 사운드는 곧 뮤지션 김광진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이후 뮤지션으로, 펀드매니저로, 또한 두 아이의 아버지로 20년을 보낸 그의 어제와 내일을 들었다.

김광진

“얼마 전 <백투더퓨처>를 30년 만에 봤어요. 정말 좋아한 영화인데 30년이 지난 지금 보니까 영화의 템포가 굉장히 느리게 느껴지더라고요. 예전에 댄스곡이라고 생각했던 빠른 노래가 요즘은 발라드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그건 우리가 너무 빨리 달려왔다는 의미겠죠? 세상이 너무 정신없이 변해 가니까요.” 여의도 사무실 근처에서 만난 김광진은 얼굴이 좋아 보였다. 예전보다 살도 많이 빠졌고, 혈색도 좋았다. 그는 지난해 17년 만에 재결합한 ‘더 클래식’의 새 앨범 <Memory & A Step>을 만들면서 음악과 병행하던 펀드매니저 일을 그만뒀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는 뮤지션으로도 인상적인 행보를 보여 왔지만 펀드매니저로도 상당히 좋은 성과를 거둬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17년 만에 ‘완전체’로 컴백하면서 그는 미련 없이 직장을 접었다. 그만큼 새 앨범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The Classic Memory & A Step

기다려 줘요 떠나가지 말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
우리에게 아직은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은 걸까
더 클래식, <우리에겐> 중에서

아직은 괜찮아

지난 2014년, 더 클래식의 재결합과 함께 디지털 싱글로 발표된 <우리에겐>이라는 노랫말의 일부다. 덤덤한 가사인데도 마음 한구석을 지그시 누르는 느낌이다. 우리 모두 정말 가끔은 그런 말이 필요하지 않던가. “아직은 괜찮다.”라고 토닥이는. 하지만 정작 그 말이 정말 필요한 건 김광진 본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드라마와 예능으로 계속 재조명되고 있는 1990년대의 중심에 더 클래식과 김광진이 서 있었다. <마법의 성>은 물론이고 <여우야>, 이소라가 부른 <처음 느낌 그대로>, 이승환의 <덩크슛>,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 등 1990년대를 지나 온 세대라면 잊지 못할 여러 노래가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참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 색깔을 가진 음악을 하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1990년대에는 어떤 곡이 순위에서 1위를 하면 충분한 당위성이 있었어요. 그게 발라드건 댄스곡이건, 그럴 만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던 거죠.”
그의 말처럼 <마법의 성>은 오랫동안 차트에서 1위를 할 만한 당위성이 있는 곡이었다. 덕분에 요즘에는 꿈꾸기 힘든 100만 장 판매라는 기록도 얻었다. 하지만 그 메가 히트곡이 오랫동안 김광진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후에 내놓은 곡들이 음악적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마법의 성>에 못 미친다는 상실감에 너무 힘들었다.
오랜 절치부심 끝에 발매한 솔로 5집에서야 그는 비로소 <마법의 성>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편지>가 등장해서다. <편지>는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획득한 곡이었다. 60대는 물론이고 10대들마저 그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훔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 곡은 실제 본인과 아내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로 알려져 더욱 많은 화제를 낳기도 했다.
“사실 처음 아내에게서 가사를 받았을 때는 썩 와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녹음한 테이프를 차에서 듣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제 노래 들으면서 눈물이 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아마 듣는 분들도 제가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을 갖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보편적인 정서는 분명히 존재해요. 물론 늘 그렇게 생명력이 긴 곡을 쓰고 싶지만, 의도대로 되는 건 아니라 아쉽죠.”

투 트랙(two track)을 달리다

김광진은 요즘 말로 ‘엄친아’였다. 김광진의 아버지는 인천에서 상당히 유명한 의사였고, 7남매의 막내인 그의 위로 6명의 형과 누나들이 모두 의사나 음악가가 되는 등 사회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았다. 그 역시 국내에서 명문대를 졸업한 뒤 1980년대에 이미 미국에서 MBA 과정을 밟고 돌아왔을 정도다. 그런 그가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집안의 반대는 없었을까?
“저는 막내였기 때문에 말하자면 부모님의 관심에서 열외였어요(웃음). 게다가 제가 직장 생활 시작과 동시에 음악으로도 돈을 벌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오히려 기특해하셨죠. 지금도 좋은 부모님 밑에서 큰 걱정 없이 컸다는 것, 다복한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걸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는 오랫동안 음악과 회사원 생활을 병행해 왔다. 언뜻 생각하면 전혀 다른 범주에 있는 두 일을 그는 성공적으로 해 왔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한 가지만 잘하기도 힘든 세상이라는 걸. 그는 어떻게 상이한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생각을 했을까.
“한때는 저도 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두 가지 일을 병행한 것이 훨씬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회사 생활이 주는 많은 관계와 다양한 경험이 음악에도 많이 반영됐기에 제 인생이 훨씬 풍성해졌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제가 엄청난 히트 작곡가가 아니기 때문에 음악으로만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 같기도 해요. 인생도 투자와 같아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두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한 종목에만 집중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생각만큼 성과가 안 나오면 너무 힘들잖아요(웃음).”

김광진

인생도 투자와 같아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두는 게 좋은 것 같아요

dream

김광진

아이들의 미래 경쟁력을 키워 주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

김광진은 1남 1녀를 두고 있다. 큰아들이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가 새처럼 여린 목소리로 ‘마법의 성’을 부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나 싶어 세월이 무상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엘리트 느낌이 물씬한 이 남자가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했다. “공부보다는 오히려 운동을 많이 시키려고 신경을 썼어요. 공부는 나중에라도 할 수 있지만 운동하는 습관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너무 ‘클래식한’ 답변이 아닌가? 쉽게 믿기 힘들었다.
“요즘은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반면 성장은 둔화되고 있어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아요. 소위 유학파라고 말하는 인재들을 바라보는 기업의 시선도 예전과 달라요. 인터넷에 워낙 정보가 많기도 하고⋯⋯ 오히려 외국계 기업이나 거대 금융회사에서 유학파보다 국내파를 더 선호하는 경향도 있어요. 인재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뀐 거죠. 이런 시대일수록 주입식 공부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 창의성을 키워 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교육이 미래에 아이들의 경쟁력을 키워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게다가 행복도 발견하는 거라고 하잖아요? 아이가 스스로 인생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게 부모에게도 더 좋아요. 아이의 인생을 평생 옆에서 책임져 줄 수는 없으니까요.”
아버지가 곡 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커서인지 그의 두 아이도 음악을 좋아한다. 아직은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자주 멜로디를 흥얼거린다고. 그 모습을 보며 그는 최근 아이들과 한 가지를 약속했다고 했다. 아이들이 지금 흥얼거리는 그 멜로디를 대학 입학 후에 함께 편곡하는 것이다. 그건 아마 어떤 입학 선물보다 값질 것이다.

김광진

인생은 꿈꾸는 자의 것

프로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2015년 넥센과 두산의 플레이오프에서 김광진이 마운드에 섰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넥센의 오랜 팬인 그가 시구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는 뮤지션이자, 펀드매니저이자, 전문가 못지않은 야구와 농구 팬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의 SNS 계정을 보면 음악이나 경제 이야기보다 스포츠 얘기가 훨씬 많을 정도다.
“저는 승부를 좋아해요. 그래서 거의 모든 스포츠를 좋아하죠. 단순히 즐기는 것보다는 ‘감독 놀이’를 하면서 봐요. 내가 저 상황이라면 저 선수를 넣고, 어떤 작전을 펼치겠다는 느낌으로 말이죠. 가능하다면 언젠가 스포츠 캐스터를 해 보고 싶어요. 좀 더 나아간다면 야구 감독도 꼭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야구 감독은 코치라기보다는 매니저에 가까운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야구에 대한 지식이 있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해외에는 비선수 출신의 감독이 많아요.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분은 NC 다이노스의 김경문 감독님이에요. 승부사로서의 판단력과 순발력이 대단한 분인 것 같아요.”
나무처럼 살아왔을 것 같은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대답을 들으며 ‘인생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는 진부한 말을 떠올렸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한계를 두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스스로에게 매력적인 일을 찾으면 앞으로 20~30년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마법의 성>으로 가요 순위 1위를 하기까지는 꼬박 10년이 걸렸고, IMF 외환위기 시절에는 투자 실패로 회복 불능 상태까지 떨어진 적도 있다. 하지만 그도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했다. 세상이란 늘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또 재미있다는 걸. 적지 않은 나이의 그가 아직도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할 무언가를 찾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다시 한 번 그의 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야구 시즌도 끝났으니 이제 다시 음악을 만들어야죠. 곡은 많이 쌓아 뒀어요. 히트할 것 같은 곡도 좀 있고요. 다른 가수 주지 않고 제가 부를 거예요(웃음). 그래야 기다려 주신 분들께 조금은 보답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