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후에 들을 누군가를 생각함

백 년 후에 들을
누군가를 생각함작곡가 조영수

글. 김수영 | 사진. 김선재(페니레인스튜디오) | 2018년 4호

2018. 04. 27 249

‘히트곡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졌을 만큼 수많은 명곡을 만들어낸 작곡가 조영수.
최근 몇 년 전까지 저작권료 수입 1위 작곡가로 실시간 검색에 올랐을 만큼 대중음악계에서 손꼽히는 인물이다.
발라드부터 댄스음악, 트로트까지 장르에 구애 없이 음악을 만들어온 그는 가장 좋았던 자신의 곡으로
얼마 전 치러진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의 시상식 음악을 꼽았다.

피아노 치며 혼자 동요 습작하던 아이

조영수 작곡가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홉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배우면서 혼자 동요 같은 곡들을 습작해보곤 했다. 음악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커져서 경문고 2학년 때는 음악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고,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뽐내기 코너에 출연하기도 했다. 연세대 생명공학과에 진학했지만, 실은 <동물원>의 김창기처럼 노래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공대 동아리 밴드 ‘활천’에 가입했죠. 2학년인 96년에 MBC대학가요제에 출연해서 제 곡으로 대상을 받았어요. 아마추어지만 인정을 받아서 신났고 덕분에 신디사이저(synthesizer)가 생겼어요. 1등을 하면 사준다고 어머니가 덜컥 약속하셨거든요. 작곡이나 편곡을 할 수 있어서 꼭 갖고 싶었는데 그 건반으로 많은 곡들을 만들었어요.”
당시는 대학가요제가 침체기로 들어섰을 때라 스타덤에 오르지는 못했다. 대학가요제는 아마추어 무대였고 전문 트레이닝을 받은 가수와 아이돌이 쏟아져 나올 때였다. 여러 회사의 제의를 받던 중 가수 <동물원>이 음반 제작을 해보고 싶다고 연락해와서 1년여를 대학로 공연 등에 함께 따라다녔다.
“제대 후 복학하고 1년 동안이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항상 자신감이 있었고, 나름 잘 살아왔는데 그때는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졌지요. 힘들어서 오히려 더 중요한 결정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요. 음악으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연줄도 없지만, 좋아하는 음악에 한번 도전해보자 하고 장기 휴학에 들어갔어요.”

세상에 내보낸 히트곡들, 생애 최고의 성취

무작정 우리나라 최고의 작곡가였던 김형석 씨 사무실로 찾아가 서성거렸다. 자신의 곡이 담긴 CD를 건네며 용기를 냈다. “제 음악 한번 들어봐주세요.” 김형석 작곡가도 그에게 호감을 보였지만 그 다음으로 히트곡이 많던 박근태 작곡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공동 작업을 하자는 제의였다.
“신인인 저에게는 너무 큰 기회였죠. 그룹 <신화>의 ‘Brand New’를 공동 작곡하고 김종국, SG워너비 같이 좋은 가수들의 곡을 많이 했어요. 무척 운이 좋았던 시기예요.”
그 후로 십 년 가까이 소위 히트곡 제조기로서 조영수 작곡가는 생애 최고의 성취와 행복을 누렸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일을 했을 뿐인데 너무나 술술 잘 풀렸고, 세상 사람들의 인정도 받아 돈도 많이 버니 잠을 덜 자도 마냥 행복했다. 한 곡이라도 더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몇 년을 작업실 소파에서 잤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일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거리에서 제 곡이 들리는 게 재밌어서 공장에서 찍어내듯 정말 많이 만들었어요.”
그런 그는 유명 가수보다 무명 가수에게 곡을 줘 히트하는 보람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한다. 유명 가수에게 곡을 의뢰받을 때는 그만큼 부담이 크다고.
“최소한 이전과 비슷하거나 더 잘 돼야 하는데, 히트에는 운도 따라야 하거든요. 무명 가수의 경우에는 제가 부모가 된 느낌이 들어요. 홍진영 씨의 경우에도 아이돌로 데뷔하려다 트로트로 전향하려고 왔는데, 그때 ‘사랑의 배터리’라는 트로트 곡을 저도 처음 써봤어요. 제 곡으로 잘 돼서 스타가 된 친구를 보면 부모의 마음처럼 뿌듯합니다. ‘산다는 건’, ‘잘 가라’ 모두 제가 만들어준 곡들이에요.”

‘서브이미지

음악을 하면 할수록 책임감 커져

조영수 작곡가는 ‘저작권료 1위 작곡가’라는 기사 이후에 “히트곡 하나면 평생 먹고살지 않느냐?”는 오해를 사곤 하는데, 실상 곡당 저작권료는 대개 1년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돈을 벌자고 하는 음악도 아니지만, 돈을 벌었다고 좋아하는 음악을 그만둘 수 있을까요? 오히려 저는 히트곡이 줄어드는 게 스트레스였어요.”
불규칙한 생활로 체중이 늘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는 욕심을 줄였다. 예전보다 곡수는 줄이는 대신 시간 투자는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 후에 누군가 내 곡을 들을 것을 생각하면 책임감이 더욱 커진다고.
그는 음악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일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 시상식 음악을 맡았던 일을 꼽았다. 선수 입장에서부터 메달을 걸고 퇴장할 때까지 흐르던 음악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메달과 주인공들에 쏠렸겠지만 그는 또 다른 선율로 현장을 채웠었다. 시상식의 기쁨과 환호에 어우러지는, 현장에서 더 웅장하게 울리던 자신의 음악에 스스로 너무나 감동했다고. 음악을 ‘업’으로 여기기에 은퇴는 없겠지만, 이후 그는 대중음악보다 영화음악이나 뮤지컬 같은 순수음악을 늘려가고 싶어졌다.

“요즘 가요는 발표 후 서너 시간이면 운명이 결정되는 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곡을 위해 짧게는 삼개월에서 일 년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달리는데요. 단숨에 순위가 매겨지고 잘 안 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포기해버려요. 작곡가의 경우는 기회가 있지만 모든 걸 쏟아부은 가수나 제작사인 경우는 안쓰럽고 미안해요. 옛날에는 내 체면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드니 가수들의 입장이 더 보이네요.”

음악의 기회는 충분히 열려 있어

조영수 작곡가도 신인들로부터 ‘곡을 한번 들어봐달라’는 이메일과 우편물을 매일 수십 통씩 받는다. 지인들이 자녀에게 소질이 있는지 봐달라고 부탁해올 때도 조심스럽기만 하다.
“음악적 기회가 많아진 건 사실이에요. 예전에는 작곡가 사무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데모 CD를 건네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면 지금은 음악 회사들이 많아져서 메일로 보내면 아마 들어줄 겁니다. 그들도 신인 작곡가에 목말라 있거든요. 이제는 실력이 있으면 기회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넷 덕분에 <볼빨간사춘기>나 <멜로망스>처럼 뒤늦게 반응이 오는 케이스도 있을 수 있죠.”
그는 만일 자녀가 음악을 하고 싶어한다면 “막연히 두려워하거나 막지 말고 기회를 열어주고 지켜보라”고 말한다. 음악을 비롯해 대중문화 전반에 예전에 없던 직업들이 생기고, 아티스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초반까지는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도록 격려하고 재능이 보인다면 전문가에게 한번쯤 문의해보는 것이 부모의 몫이라는 그의 현실적 조언에 고개가 끄덕여진다.